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레를 보기로 한 후에 어떤 공연을 볼 지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가 아는 발레가 몇 개 안 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제일 먼저 떠올랐는데 마침 마린스키 극장에서도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돈으로 20 만원 가까운 거금을 주고 자리를 예약했을 때부터 내 초점은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공연을 보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오직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정장과 구두, 와이셔츠까지 캐리어 가방에 챙겨 넣었는데, 공연을 보고 나자 더 이상 입을 일이 없어서 안 그래도 캐리어 가방이 무거운데 한 동안 짐으로 가지고 다녀야 했다.
6 일 밤낮으로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질러 마침내 마린스키 극장에 도착했다. 공연 시작하기 1 시간 전에 도착해서 극장 안을 둘러봤는데 낮은 천장과 좁은 복도,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문들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구석구석 최대한 많이 돌아보고 싶었는데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극장에서 공연했던 역대 배우들이 전시된 작은 홀과 매점 그리고 화장실뿐이었다. 복도를 배회하는 중에 닫혀있던 공연장의 문이 열렸고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 안에 들어섰다. 내가 예약한 자리는 무대에서 가까운 앞쪽에 있었다. 텅 빈 극장을 가로질러 앞으로 걸어가는데 무대에 처진 화려한 휘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정 러시아 때부터 있던 것처럼 보였는데 무대 전체를 덮는 큰 휘장에 세밀하게 수놓은 모습이 마치 벽 위에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휘장에 압도당해서인지 극장 안의 모든 것에서 품격이 느껴졌다. 나무 의자들과 벽에 있는 백열전등, 그리고 약간 어두침침한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그 건물이 가지고 있는 유구한 전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러시아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의외로 동양인들도 많았고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보였다.
공연이 시작되자 상상만 하던 게 실제 이루어진다는 것 때문에 전율이 느껴졌다. 막이 올라갔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공연을 지켜봤다. 아름다웠다. 여배우들의 실루엣이 너무나 예뻤고 군무를 추는데 누구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래서 세계 일류인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백조의 호수 줄거리를 찾아봤는데 이야기 자체는 동화라서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과 어우러진 무용수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름답고 기품 있어서 공연 시간 내내 넋을 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