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바를 떠나 평야 지대를 가로질러 한참 달리다 보니 오른편으로 바다가 나타났다. 발트해였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약간 거칠지만 섹시해 보이는 운치 있는 바다였다. 석양이 환상적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모든 게 타오르듯 붉게 빛나고 있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창밖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석양에 물든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로 가는 길이 보였는데 드라마에서 봤던 장면 같기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 얘기를 나누며 그 길을 따라 바다까지 걸어가고 싶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후에 출발했는데 밤이 돼서야 탈린 버스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리가와 빌뉴스를 경유해 바르샤바까지 데려다 줄 버스는 다음날 이른 아침에 출발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터미널에서 기다려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른 저녁에 탈린에 도착해서 구시가지에 잠깐 가볼 생각이었다. 버스가 탈린에서 정차하는 몇 시간 동안 에스토니아 전통 음식도 먹고 이 지역의 명물인 시나몬에 볶은 아몬드도 몇 봉지 살 계획이었다. 나도 먹고 가능하다면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도 소포로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버스를 놓치고 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날 태우고 왔던 버스가 떠나고 텅 빈 주차장에 혼자 남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갈 곳이 없었다. 같이 버스를 타고 왔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분주히 걷고 있었지만 여기서 밤을 보내야 하는 나는 천천히 캐리어 가방을 끌며 터미널 대합실로 걸어갔다. 대합실에서 밤을 보내도 괜찮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막상 대합실에 가보니 사람들도 제법 있고 팔걸이가 없는 긴 의자들도 있어서 누워서 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와서 창가 쪽 긴 소파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으로 불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거리를 바라보며 그래도 터미널 안이라서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고 있었는데, 터미널 안 가게들의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하더니 한 할아버지가 오셔서 터미널 문을 닫아야 하니까 나가라고 하셨다. 어쩔 수 없었다. 짐을 챙겨서 불빛 하나 없는 터미널 밖의 어두컴컴한 거리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