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1월이 다 가도록 구체적인 방문지를 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움직 일지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세비야와 바르셀로나를 포함해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에서 석 달 정도 여유롭게 머물다 오는 것까지는 나왔는데 어떤 길로 거기까지 갈지가 고민이었다. 바르샤바에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해 동유럽을 거쳐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스페인으로 갈지, 아니면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해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을 방문하고 이탈리아로 갈지를 놓고 고민했는데 결국 서쪽으로 가기로 했다.
스킨헤드 때문이었다. 동유럽에도 러시아 못지않게 스킨헤드들이 많다고 하는데 어떻게든 빨리 그 지역을 벗어나고 싶었다. 베를린도 위험해 보였고 옛 서독 지역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인 함부르크까지는 가야 안전할 것 같았다. 일단 함부르크에 도착하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하루라도 더 있기 위해 바로 스페인으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함부르크에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오는 교통편을 알아보다 보니 거기까지 갔는데 프랑스 파리도 안 보고 온다는 게 못내 아쉬웠다. 어차피 기차로 이동하는 경로의 중간에 파리가 있었고 며칠 묵었다 스페인으로 가도 일정에 큰 문제는 없었다.
파리를 방문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나자 다른 도시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지금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과 과학 이론들이 탄생한 곳,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봤던 도시들에 직접 가볼 수 있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회였다. 함부르크와 파리 사이에 있는 네덜란드, 벨기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과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을 언제 또 방문할 수 있을까, 거리 사이로 흐르는 아름다운 운하를 언제 볼 수 있으며, 맛있다고 소문이 난 브뤼셀의 와플을 언제 먹어볼 수 있을까,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기회였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에 파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 백년전쟁과 잔 다르크, 로마 교황의 아비뇽 유수와 같이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던 사건들의 주요 무대가 바로 프랑스였다. 가장 프랑스적인 곳에서 가장 프랑스적인 것들을 보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가고 싶은 곳들을 목록에 하나씩 추가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거쳐 서유럽을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길이 그려지고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지브롤터였다. 유럽에서 가볼 수 있는 한 끝까지 가보는 게 목표였는데 유럽 끝에서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것만큼 이 여행에 어울리는 목적지는 없었다.
영국이 고민이었다. 애초에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여행을 계획할 때는 영국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이국적인 곳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는 게 여행의 목적이었는데 영국은 이국적이지도 않고 여유로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서유럽 전체를 돌아보는 것으로 여행의 방향이 바뀌어 가면서 영국을 지나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을 빼고는 유럽을 생각할 수 없었다. 산업 혁명의 발상지이자 프리미어 리그가 펼쳐지는 곳이었고, 영국 박물관과 버킹엄 궁처럼 수준 높은 박물관과 관광 명소들이 있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봤던 벽돌 주택들과 이층 버스, 스코틀랜드의 척박한 자연환경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문제였다. 일단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가면 런던을 시작으로 스코틀랜드 북쪽 끝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방문하고 싶은 곳들을 추려보니 대략 3 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3개월 일정으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와서 스페인으로 가면 여행을 시작하고 2 개월이 지나서야 목적지인 지브롤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은 1 개월 안에 스페인에서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폴란드, 발트 3국을 거쳐 러시아까지 온 다음에 다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야 했는데 방문지에서 며칠씩 머무는 걸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지브롤터까지 가는데 2 개월이 걸린다면 지브롤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오는 것도 2 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했다. 3 개월도 부담스러운데 4 개월 동안 있다 오는 건 지나치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갔다 오면 개인적으로 준비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창업을 해야 하는데 한 달 늦게 오는 건 창업 시점도 한 달 뒤로 미뤄진다는 얘기였다.
돈도 문제였다. 이미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금액을 초과하고 있었다. 체류 기간이 한 달 늘어나면서 발생할 몇 백만 원의 추가 비용을 생각하면 숨이 턱 하고 막혔지만 언제 또 거기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설령 내가 준비하고 있는 일이 실패하더라도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 몇 백만 원은 벌 수 있었다. 결국 영국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영국에 가면 스코틀랜드 북쪽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바닷가 옆 척박한 땅에서 말 그대로 미친바람을 맞으며 파도가 출렁이는 북해를 바라보는 걸 상상했는데 아직 간 게 아닌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영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이동 경로를 짤 때도 일단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다가 나올 때까지 갔다. 바다가 나왔다는 건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곳까지 왔다는 의미였다. 끝까지 본 거니까 몸을 돌려서 나온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었다. 프랑스 북부에서는 생 말로에서 영국 해협을 본 다음에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고, 프랑스 남부에서는 듄드필라에서 비스케이 만을 보고 난 후에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스페인으로 향했다. 스페인에서는 남쪽 끝까지 내려가 카디즈에서 햇빛에 반짝이는 대서양을 감상했고, 프랑스 니스에서는 지중해 입수식을 거행했다. 이탈리아 아말피에서 버스 정류장을 착각하고 잘못 내리는 바람에 해안 절벽에 난 도로를 따라 포지타노까지 한 시간이 넘게 걸어야 했는데 그때 보던 티레니아 해의 석양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