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동몽(同床同夢)이 필요하다

조직의 언어는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

by nay

10여 년 전 일입니다. 경영진의 연구소 방문이 있었습니다. 방문이 끝나고 회의록에 '앞으로 바이오 연구에 더 힘써달라'는 코멘트가 있더군요. 바이오 연구라.. 대체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래요?라는 순진한 질문에 (당시엔)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글쎄, 그분도 잘 모르실걸?'

그때부터 제 머릿속 한 구석에는 늘 윗사람이 생각한 바이오 연구란 무엇이었을지 찜찜한 기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경영진이 바라보는 '바이오'가 대충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감을 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발표자는 새로 론칭하는 인공피부 연구과제를 청중 앞에서 열심히 발표했습니다. 경영진이 과제 얘기를 듣고 이런 코멘트를 하시더군요.


'그.. 인공피부 기술을 잘 개발시켜 주세요. 난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나이 든 여성분이 동창회에 나가야 하는데, 우리가 만든 인공피부를 얼굴에 착 붙여서 젊어 보이게 말이야. 그러니까 다른 동창들은 다들 나이 들어 보이는데, 우리 제품을 쓴 고객은 훨씬 어려 보이는 거죠'


연구소에서 개발하는 인공피부는 전혀 그런 목적과 달랐습니다. 아니, 원래 그런 일이 아니었어요. 과제에서 말한 인공피부는 <사람의 피부를 모사하는 형태로 만들어 여러 가지 평가나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나 나올 법한 기술과는 동떨어진 일이지요. 화상 치료와 같은 목적으로 인공피부를 개발하여 인체에 적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엄연히 의료용이고, 늙은 피부에 부착해서 잠깐 동안 어려 보이게 만드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물론 경영진은 상세 기술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공자들도 관련된 경험이나 지식이 없으면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데, 비전공자에게 당연히 어려운 얘기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발표 내용과 코멘트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었던 것은 확실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오래전 바이오 기술에 힘써주세요 라는 말이 어떤 뜻이었을지 헤아려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기술을 바라보는 엄청난 시각 차이를 다시 한번 깨달았달까요. 여전히 명확한 의미에 대해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퇴사하는 순간까지도 모를지도요.

만약 1년 뒤, 과제의 성과를 발표할 때 평가자인 경영진으로부터 왜 이런 일을 인공피부 과제에서 했느냐고 반문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약간 병적으로 회사에서 소통되는 단어에 대해 신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별적인 단어의 뜻풀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담긴 뜻을 정의(define)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제대로 된 업무의 방향과 목표를 찾기 위함입니다. 저에게 외부 기술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정확히 궁금한 점이 무엇인지,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 물어봅니다.


어떤 용어, 단어에 대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한다고 여기는 것에 진짜 문제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를 할 뿐, 어느 누구도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확하지 않은 정의에서 시작된 일이 업무로 진행되면 일의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윗사람이 툭 던진 단어 하나에 목을 매거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이슈 몰이를 하는 경우 조직의 자원이 낭비될 소지가 큽니다. 이것은 경영진뿐만 아니라 단위 조직의 리더에게서 나오는 어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시하는 사람 자신도 명확한 그림 없이 단어 하나 던져주고 일을 시켜서는 곤란합니다.


경영진이나 리더 입장에선 '야, 내가 그런 것 까지 세세하게 알려줘야 하냐? 나 때는 다 알아서 했어'라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제 대답은 '네, 그런 것까지 알려 주셔야 합니다'입니다. 알아서 해 왔더니 '내가 언제 그거 하라고 했느냐'라며 나중에 가서 역정 내지 마시고요.


이해는 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희미한 이미지나 개념은 있지만 정확하고 구체적인 묘사가 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있지요. 그런 경우 '나와 함께 그 고민을 나누자'라는 의도에서 화두를 던질 수는 있습니다만, 당장 그 일을 수행하라고 명령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아직 정의하지 않은 문제를 남에게 시킨 후 가져오는 결과물에서 취사선택할 요령인 걸까요? 과거 일을 열심히 하면 그 행위 자체가 성과가 되는 시절에는 통하는 방법이었을지 모릅니다. 시간과 자원이 넉넉하다면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요.



The devil is in the detail


좋은 리더는 디테일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지요. 어떤 일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성공적인 업무 완수를 위해 작은 것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는 때입니다. 특히 기술개발은 많은 자원이 투자되는 영역입니다. 이런 부서의 리더라면 문제를 더 명확하게 정의하고, 남과 소통할 때 모호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은 아끼는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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