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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Nov 23. 2022

작가에 대한 오해를 풀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경험담이든 무릇 작가는 글을 쓸 때 갖춰진 채로 각 잡고 앉아서 글을 쓴다는 상상을 해왔었다. 예를 들어 역사 소설이라면 역사적 사실과 배경에 대한 전체 이야기를 꿰뚫는 것뿐 아니라 머릿속에 착착 쌓여 있다고 말이다. 작중에서 인용되는 다양한 내용들에 대해서도 놀라운 기억력을 기본 바탕에 두고,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적재적소에 꺼내놓는 것. 그래서 작가의 세계라는 것은 그들의 상상력과 필력뿐 아니라 기억력이 대단하구나, 평범한 사람과 다르긴 다르다는 막연한 동경과 경외의 대상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동경의 마음은 나의 글쓰기를 제한하게 되었다. 내가 작가라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려면 다양한 책을 읽고, 그것을 다채롭고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며, 당연히 무슨무슨 책의 어느 구절에 의하면.. 하고 멋진 문장이나 표현을 인용하는 능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이상향을 그려놓은 까닭이다. 이런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라 보았다.


나의 글에 다른 책이나 문구를 나름대로 인용하기 시작한 것은 독서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면서였다. 책을 볼 때 전체적으로 작가가 주장하는 바, 전달하고 싶은 내용을 파악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지엽적으로는 특정한 문장이나 문단에 꽂히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대개는 나의 고민을 해소해 주거나, 부족한 상상력과 경험을 대체 또는 보완해 줄 수 있는 것들이기에 그랬다. 읽는 그 순간에는 아하, 그래 이거지! 하고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만 다음 장,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대체로 잊히기 마련이다. 붙잡아두기 위해 디지털 필사(손글씨가 아니라 타자로 쳤다는 뜻)를 시작했다. 내용이 길어지면 그것도 귀찮아 OCR이 되는 캡처 앱으로 책의 일부를 기록해 두었다. 돌아보니 이 행동에 꽤 의미가 있었다. 필사든 캡처든 인용된 내용에서 시작한 생각을 생각 가는 대로 기록을 했는데, 어쩌면 현재의 글쓰기 틀을 갖추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이 되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참고문헌이 있는 글쓰기와 읽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훈련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학술 논문을 쓰려면 대체로 ‘참고문헌(레퍼런스)’라는 걸 활용할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란 없기도 하거니와 내 연구의 시작이나 전개에 있어 세상 어딘가에 이미 비슷한 일을 해 둔 선배의 기록을 당연히 활용, 인용해야 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이때 마치 자기의 결과나 생각인 양 남의 것을 베끼는 행위는 연구 윤리에 어긋난다.


학술 논문은 plagiarism(표절)이란 것을 심각하게 경계한다. 다른 사람이 논문에 쓴 표현을 가져다 쓸 때도 내용을 이해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 극단적으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과거 논문에서 표현이나 문구를 다시 가져오는 행위조차도 용서받지 못한다. 하나의 논문이 완성되려면 논리적 흐름과 가설의 검증이라는 확실한 데이터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잘 표현해 내는가도 매우 매우 엄격하게 판정할 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이런 습관과 학습이 오히려 일반적인 글쓰기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다 가져왔지 싶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데 있어 이걸 내가 가져다 쓰는 게 맞는지, 마치 내 얘기처럼 각색하는 과정이 부당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표현을 불러오는 것은 '글쓰기라는 창작의 행위'와 대척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모름지기 좋은 작가라면 자기 생각과 상상력, 기억력의 힘을 빌어 앉은자리에 단지 컴퓨터와 자판만으로 (또는 펜으로) 술술 글을 써 내려가야 한다고 편견을 확증해 왔었다.


언젠가 방송에서 전문 작가가 등장해서 하나의 책을 만들기 위해 어떤 조사를 하고, 공부를 하는지에 대해 얘기한 것을 보고 아, 그렇구나 하며 다시금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배경이 되는 지역을 찾아가고 그걸 정리해 둔 노트들,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여 거기에 기반을 둔 이후에 비로소 작가적 상상력과 문필력을 바탕으로 시작되는 것이 글이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작가도 사람인데 어찌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아둘 수 있겠는가 싶다. 연구와 조사 없이는 작품을 완성하기 어려운 것이다. 무엇인가 탄생의 배경에는 리서치가 있어야 한다! 자연 발생설은 창작의 세계에서도 설득력이 없다.


그리하여 나도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글을 씀에 있어 모두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걸 풀어내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걸 잘 활용하고, 이 자리를 빌려 모르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논문에서 레퍼런스는 내 주장을 하는데 근거로 쓰기 위함이라, 타인의 멋진 표현을 적극 검토하고 나의 글쓰기 방식에 활용하면 좋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를 지나치게 ‘타고난 누군가의 능력'이라는 영역으로 볼 필요 없다. 자기 생각을 정리해 내는 툴로 바라본다면 조금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진 채,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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