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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레드 Oct 03.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초가 죽어가고 있다. 화초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라.

이야 너가 진짜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햇빛도 안 쐬고, 영양제도 다 뱉어내고. 이거 봐라 이파리 끝 쪽이 벌써 누레졌어. 너 그러다 진짜 아사한다?


어휴 고집은. 대답하기 싫으면 그냥 혼자 떠들다가 갈게. 듣든가 말든가. 


여기 처음 왔을 때 기억해?


주인이 이 집으로 처음 이사 온 날. 그래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데려온 게 너랑 나야. 그때 진짜 작았는데, 처음 보고 잔디인 줄 알았어. 나도 그때는 엄마 젖 먹다가 와서 똥오줌 못 가릴 때였지만. 그때 주인 침대에 오줌 싸서 벌로 간식 못 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서럽더라. 뭐라 하는지도 모르겠고.


저 여자가 사모님이 된 날. 너도 기억하지? 화분으로 이사했잖아. 인간들 말로는 승진? 그때 우리가 이 집에서 제일 오래됐다고 상 받은 걸로 기억하는데. 넌 넓은 화분을, 나는 새로운 집을 받았지. 근데 솔직히 그 집 별로야. 별로 푹신하지도 않아. 그냥 방석이 최고인 거 같아. 


아, 그리고 주인 놈한테 아들이 생겨서 많은 사람들이 축하한 날. 물받침대에 실례한 건 미안하다. 야 멍소주가 쌔긴 해. 나라고 어쩌겠냐. 내 평생 그런 물은 처음 먹어보는데. 그거 먹으면 그냥 정신 못 차리는 거야~ 앞다리뒷다리가 따로 움직인다니까? 나중에 내가 기회 봐서 한 번 꽂아줄게. 계속 생각날걸~


야 벌써 15년이다. 이 집에서 한 사람이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꾸리고, 그 애가 초등학교를 가.


생각보다 살만 하지 않았냐?


물론 힘든 일도 많았지. 굳이 하나하나 나열하지는 않을게. 근데, 힘든 일은 앞으로도 있을 거고, 그때도 처음 힘든 것처럼 힘들 거야. 


매일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어쩌면 행복은 간식일지도 몰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힘듦에서, 아직 행복한 것들이 남아있다고 알려주는 간식. 간식도 많이 먹으면 행복한지 모르니까 조금씩 나눠서 받는 거 같아.  


너가 지금 혼자 간식을 못 찾아 먹으니까, 주변에서 잘 챙겨주잖아. 잘 챙겨 먹어. 그것도 예의야. 


아무튼. 잘 무너지고,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해 뜬다. 난 주인 아들놈 깨우러 가야 해. 안 그러면 지각이야.


간다. 밥 챙겨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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