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베프

(not “Be”st “F”riend but "Bad Friend")

by 운동화

몇 년 전 항공사 마일리지로 포인트가 적립되는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연회비가 꽤 비싼 카드였는데 만들 당시의 혜택이 여러모로 좋아서 2년만 쓰고 해지할 요량이었다. 해가 지나고 코로나가 터지면서 한 해 연회비를 안 받고 연장해 준다고 하길래 또 계속 쓰게 되었다. 그렇게 2년을 더 쓰고 해지 전화를 하기 전 쌓인 포인트를 항공사 마일리지로 바꾸다가 깜짝 놀랐다. 마일리지가 엄청나게 쌓인 것이다. 사용액이 그리 많지도 않아서 무료 라운지 사용 혜택 자격 요건도 탈락한 사람인데도 마일리지 변환율이 높아서 카드 포인트를 마일리지로 바꾸니 두 사람의 동남아 왕복 항공권을 살 정도가 쌓여 있었다.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하루 뒤 날아온 문자였다.


“고객님은 OOO 회원으로 승급되셨습니다, 자세한 혜택은 링크를 놀러 확인하세요.”

아유, 이거 스팸이구먼. 어디 누굴 낚으려고 들어? 문자를 삭제하려고 보니 보내는 번호에 항공사 로고가 자동으로 떠 있었다. 마침 어제 카드 포인트를 마일리지로 변환 신청해 놓은 터라 약간의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오마나! 진짜네!! 나는 쌓인 마일리지로 한시적인 VIP 회원이 돼 있었다. 흥분되고 신나는 기분에 남편에게도 자랑했다. 내가 언제 항공사 VIP가 돼 보겠는가. 이 혜택을 알차게 누리리라! 엄숙한 다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항공사의 혜택을 받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그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야 한다. 그러나 내가 클럽 회원이 된 항공사는 최고가를 자랑하는 항공사였고 코로나가 풀린 뒤의 여행에서도 그 항공사의 항공권 가격은 너무 비쌌기 때문에 항공권을 살 일은 없었다. 회원 혜택을 포기하더라도 2~30만 원이 더 싼 다른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는 게 당연히 옳은 선택이었다. 언제나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최저가 항공권이나 검색하여 이 비행기, 저 비행기, 시간과 돈이 맞는 항공사로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나에게 항공사 혜택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던 이번 겨울 결국 회원 혜택이 곧 끝난다는 메일이 도착했다. 클럽 회원 자격을 유지하려면 몇 마일을 더 타고, 몇 번 이 항공사의 비행기를 더 타야 한다는 친절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미션과 함께 도착한 메일을 열고 ‘아, 타보지도 못하고 끝나게 생겼네.’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던 중 친구가 마일리지로 방콕을 여행하자고 제안했다. 쌓아둔 마일리지로 딸이랑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 발리로 언젠가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지만, 친구의 제안에 나도 모르게 뭐에 홀린 듯 후루룩 마일리지로 겨울 성수기 방콕 항공권을 끊었다. 딸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 친구의 자매들과 함께 갈 수 있는 데다가 여러모로 바쁜 친구가 어렵게 낸 시간으로 제안한 여행이라는 걸 알기에 발리는 아까운 생각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신나고 즐거운 일이지만 이번 여행의 설렘에 한몫을 더한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클럽 회원이 되어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기대였다.


일하는 친구는 며칠 뒤 합류하기로 하고 나는 딸과 함께 먼저 방콕으로 출발하게 됐다. 공항 카운터에 도착하니 클럽 전용 창구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S자로 늘어선 긴 줄을 지나쳐 줄 선 이 없는 한적한 라인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가 뭐라도 된 듯 어깨 뽕이 봉긋 치솟았다. 맡겨진 여행 가방에는 클럽 전용 테이프가 눈에 띄게 붙여졌고, 나는 딸과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바로 출국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회원 전용 라운지도 이용할 수 있었기에 미리 위치를 알아두고 찾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딸과 나는 소식 모녀라 라운지 음식이 아무리 많이 차려져도 다 맛볼 수 없을뿐더러 준비된 음식들도 시중에서 얼마든지 쉽게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인 라면, 비빔밥 같은 것들이라 별거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짠데 이게 어디냐는 마음으로 괜스레 본전 생각이 나서 배도 안 고픈데 자꾸 이것저것 가져다 먹기 시작했다. 먹는 도중에는 항공사에서 당신의 수화물이 비행기에 무사히 탑재되었다는 안내 문자가 날아왔고, 이어 탑승구가 변경된 것도 친절하게 안내 문자로 왔다. 와 클럽 회원이 좋긴 좋구나. 앉아서 내 짐이 어디 있는지도 알게 되고 변경된 탑승구에 당황할 일도 없고 말이야. 나는 신이 나서 볶음밥 한 접시만 먹고 앉아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딸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컵라면 하나 더 먹으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방콕 공항에는 입국하려는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였나 싶게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입국 심사만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지칠 대로 지쳐 수화물 컨베이어 벨트까지 도착하니 ‘클럽 회원 짐은 우선 하차’라는 혜택이 무색하게 승객들의 모든 짐이 이미 다 나와 있었다. 먼저 나온 캐리어를 끌고 의기양양하게 입국장 문을 나서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나는 입국심사장에 괜한 화풀이를 하며 공항을 빠져나왔다.


여행은 언제나 기대보다도 훨씬 짧은 법, 2주라는 시간은 즐길 새도 없이 훌떡 지나가 버리고 어느새 출국일이 되었다. 우리 다섯 명은 차 두 대를 따로 빌려 각자 공항에 도착하기로 했다. 먼저 차가 잡힌 나와 딸이 공항에 일찍 도착했다. 여전히 출국장 카운터에는 줄이 길게 서 있었고 나는 딸과 함께 역시 클럽 라인에 서서 수월하게 수화물을 부쳤다. 화장실을 다녀오니 친구네 모녀가 막 도착하여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섰다. 나의 갈등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갈까, 말까.’ 그러자니 한 시간은 넘게 걸릴 기다림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처음이자 마지막 클럽 회원 혜택인데 이렇게 누리지도 못하고 끝내긴 싫었다. 배려심이 넘치는 친구는 먼저 들어가라며 안에서 만나자고 손을 흔들었다. 친구와 함께 서 있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딸과 함께 출국장에 먼저 들어섰다.


출국심사는 꽤 시간이 걸려서 우리는 약간의 시간을 남기고 면세구역에 들어왔고 딸과 간단하게 간식을 먹고 탑승구로 갔다. 워낙 출국장에 줄이 길었던 터라 나와 딸은 친구네가 탑승 시간까지 올 수 있을지 걱정했다. 다행히도 탑승이 곧 시작될 무렵 친구네 가족도 탑승구에 도착했다. 아이들의 피곤하고 지쳐 보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가 같이 기다렸다가 들어온다고 애들이 덜 피곤했겠어?’라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들어와 간식까지 먹고 온 마음이 엄청나게 찔렸다. 아이들 먹을 간식, 친구가 마실 커피 한잔 안 사서 기다리고 있던 나의 짧은 생각에도 그제야 뜨끔했다.


그런데 나의 옹졸함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비행기 탑승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올 때도 클럽 회원 먼저 탑승 안내를 해서 줄 없이 탔는데 이번에도 안내 방송을 하길래 친구에게 우리 먼저 들어가도 되냐면서 딸을 데리고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타는 좌석이 비즈니스도 아니고 어차피 일찍 타 봤자 불편한 좌석에 더 오래 앉아 있을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먼저 줄 없이 들어가는 호사를 누리고 싶어서 나는 급할 필요가 없는 탑승을 친구네 가족을 남겨두고 먼저 했다. 뻔뻔하게 딸의 손까지 붙잡고서.

비행기에 타 자리에 앉고서야 부끄러움이 심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번뿐인 클럽 회원 혜택을 누리자고 나는 아이들이 보는 자리에서 무슨 짓을 했던가.


ㄹ자로 이어진 공항 카운터의 줄 앞에서 한 발씩 앞으로 옮겨가며 긴 시간을 서 있을 때마다 나는 프라이빗 라인에서 줄 없이 입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딸에게 자본주의의 무서움과 치사함을 이야기했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공간과 시간이라면서 그 소비가 극단적인 장면으로 연출되는 공항이라는 장소의 비윤리성에 관해 설명했다. 어느 공항에서는 출입국 순서도 돈으로 팔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기사를 읽고 자본주의 천박함의 극치를 보여준다면서 침을 튀기며 분노의 비난을 쏟아놓고는 했었다.


그런 내가 함께 여행하고 날짜에 맞춰 함께 귀국하는 친구를 줄에 세워두고 혼자 그 천박함을 전시하며 비행기를 탔다. 딸에게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사는 삶을 입으로 떠들던 내가 딸과 딸의 친구가 보는 앞에서 내가 가진 특권으로 남을 어떻게 배제하고 우선권을 쥐고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었다.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면서 그 반대를 실천한 나의 이기적인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그나마 이런 선택의 순간에 계속 마음 한편에 자리한 찜찜하고 찔리는 마음이 있었다는 게 용서받을 기회를 달라고 할 자격조건이 되어줄까.

애초에 클럽 회원이 되지 않았다면 먹지 않았을 마음이다.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내게 주어진 특권은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니다. 라면 한 그릇, 맥주 한 잔 공짜로 먹고, 줄 30분 안 서고, 짐 몇 분 일찍 찾는 게 전부인 특권이다. 이 별것 아닌 특권에도 나는 쓰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 되어, 당연히 내 것인데 누리지 못하는 억울한 입장이 되어, 부러워하는 남의 시선을 즐기는 천박한 인간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린 이기적인 괴물이 되어 버렸다.


나는 친구에게 베스트 프랜드가 되고 싶었는데 최악의 이기적인 친구가 되어 버렸다. 만나면 즐겁고 따뜻한 이모가 되고 싶었는데 배려라고는 모르는 유치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나눔과 공존을 실천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한 입으로 두말하고 말과 행동이 반대인 이중적인 엄마가 되고 말았다.


이야기를 너무 못 나눴다며 비행기에서 남은 수다를 잔뜩 떨자던 친구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일없이 영화가 상영되는 화면만 보다가 마음을 열 필요 없는 일정과 관련된 짧은 대화만이 오고 갔다. 나는 비행기 자리에 앉자마자 나의 모든 순간을 후회했지만, 다시 친구가 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해도 내가 바람직한 선택을 고쳐서 하리라 보장할 수 없었다. 이미 선택의 순간에도 마음속으로는 여러 번 생각하다 결정한 것을 안다. 그때라고 이런 부끄러움을 몰랐을까. 이 비겁함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아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 내 특권을 포기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컸을 뿐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게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나를 망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어떤 비난의 말도 없이 헤어지는 순간까지 안녕한 귀가를 나누어 주었던 친구의 배려와 이모에게 손 흔들어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기적인 엄마에게서 언제나 이중성을 보면서 부조리를 느꼈을 내 아이의 눈을 떠올리면서 나는 이제야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욕망이 나를 망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면서 살아야겠다. 언제나 패배하기 너무 쉬운 싸움이라는 걸 알지만 오늘의 이 반성을 기억하면서 다음번에는 조금 더 싸움에서 버텨보고 싶다. 진짜 베스트 프렌드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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