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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티브 Antibes Jun 24. 2024

험한 자연에 뿌리내린 길 - 베르나차에서 코르닐리아로

 베르나차 항구에서 하염없이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사진찍는 커플 (참 요란하게도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눈 앞에서 얼씬 거린다.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고 싶은데 좀 거슬리지만 모 그렇게 좋은가 싶어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짜피 그들은 우리가 안중에도 없는데 내가 그들을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뿐.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이 내 쓸데없는 시선과 그 시선에 집중된 에너지가 불필요하게 소요되기 때문은 아닌가 싶었다. 내가 조용히 그 시선을 닫으면 그만인 것을), 가끔씩 지나는 작은 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해가 중천을 지나 이제 어느덧 늦은 오후로 접어들고 있음을 문득 깨달았다. 한국에선 일분 일초를 아끼기도, 또 헛되이 시간 쓰는것에 알레르기가 있던 때도 있었는데,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음을 놓다니, 나로선 또 놀랄 따름이었지만, 무념무상으로 해변에서 어느덧 지나간 느린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 잡음, 그리고 마음에 가득했던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 다 녹아내린 듯 하여 반갑고 나 자신이 기특했다. 또 한껏 나르시시즘이 몰려오신다. 스스로 쓰담쓰담하고, 길고 깨운한 낮잠을 잔 듯 가벼운 마음이 다시 그 다음 마을을 꿈꾼다.




 항구에서 마을 중심을 지나 기차역으로 향하는데 젤라또 가게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 2월. 운동과 다이어트라는 식상한 새해결심은 이미 사그라들어, 먹는것인가 입는것인가 하고 있지만, 내심 난이도 높은? 트레킹을 한터라 운동으로 갈음한지는 오래고, 다이어트는 어쩐다. 기름진 음식을 점심으로 배를 풍족케 한 걸로 모자라 젤라또라니.

 

 그러나.....

 

 이탈리아 하면 또 젤라또 아닌가? 아까 커피에 애써 녹여먹은 조그마한 눈에 보이지도 않던 사탕 덩어리는 디저트는 아니지 하며, 핑계의 뒤안길을 마구 뒤진다.


 그렇다.

 다이어트는 종교다.

 다다르고 싶지만 절대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인 것을.

 미천한 이 나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되돌이표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

 결국 3가지 맛이나 골랐다.


 꿀맛이다.

 

 

 결국 콘까지 남김없이 섭취하시고, 다음 여정에 올랐다. 다름 트레킹에 3가지 맛의 젤라또와 콘 과자가 귀한 거름과 에너지원이 되리라.  





 코르닐리아로 향하는 화살표가 눈에 들어왔다.


 코르닐리아.

 발음도 참 이탈리아스럽다.



 화살표를 따라 조금 올라가니, 도리아 성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사뭇 다른 풍경에 새삼 놀란다. 사람과 물체의 모습을 평소와 다른 각도로 바라볼 때 새삼 새로운 모습에 놀라듯, 사랑하는 사람을 먼발치에서 그 사람 모르게 몰래 바라보듯이, 베르나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내 다시 익숙한 올리브 나무 숲과 산속 와이너리 풍경에 둘러쌓인다. 다시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 듯 하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자, 다시 마음속의 응어리들이 하나씩 주인공이 되어 나타난다. 1막은 정치극은 서러워 도망갈 회사생활의 단상들, 2막은 프랑스 3년살이의 아쉬운 기억들 그리고 3막, 4막, 5막 ...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이 각 막이 오를 때마다 주인공들과 등장인물들을 갈아치우며 눈 앞에 영화처럼 지나간다. 코르닐리아로 향하는 그리고 이 신선한 공기와 지중해를 옆에 끼고 화려한 늦은 오후의 정취를 즐기는 이 순간에도 진정 나는 나 혼자인 것인지. 지금의 나는 누구인지.


 도대체 몇 개의 나와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인간은 이렇듯 시간의 굴레에 갇혀 지금 이 순간에 오로지 집중하여 오로지 이 순간의 나를 위해 오로지 이 순간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오로지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가능은 한 것일까.


 이번 트레일은 지난 트레킹보다는 난이도가 다소 낮은 탓인지 이미 지난 트레일에서 험란한? 여정을 거쳐온 터라 학습의 힘이 제대로 발휘되어 이미 오만함의 독버섯이 온 마음을 뒤덮은 것인지.

 다시 긴 호흡으로 들숨과 날숨에 집중한다. 오로지 이 순간에 집중하여 이 순간을 즐기는 나 자신에 대한 톡톡한 훈련이 더 필요하다. 그런 훈련을 위해 오른 이 리프레시 휴가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오로지 이 순간을 사는 나 자산을 다시 발견하리라 또 다짐한다.



이런 작은 깨우침의 시간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산 중턱이 있을 법 하지 않은 화려한? 까페와 그 까페 앞의 드넓은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까페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예술일 듯 싶다.




 이내 저 멀리 절벽위에 옹기종기 자리잡은 코르닐리아가 손짓한다. 서로 손잡은 듯, 포개진듯, 절벽의 굴곡을 따라 일렬로 주욱 늘어선 파스텔 집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그 옆으로 펼쳐진 포도밭과 삶의 현장이, 그 뒤로 펼쳐진 바다의 광활함이 또 묘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멀리서 보는 풍경은 실로 파스텔톤 꿈결같지만, 코르닐리아 마을은 멀리서 보아도 다른 마을들과는 달리 높은 언덕 위에 둥지를 틀고 있어, 마치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요함이 흐른다. 이런 험난한 환경에서도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용기와 끈기가 놀랍기만 하다. 험한 자연에 뿌리 내린 이 길 위를 걷고 있는 나에게도 그들의 에너지와 일상의 지혜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하다. 그 기운을 듬뿍 받아 마음 한 가득히 담아 간직하고 돌아가야지.



오후가 서서히 내리듯, 트레킹도 마무리로 치닫아, 마을로 서서히 내리고, 내 마음도 코르닐리아 마을로 서서히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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