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판 위의 말들
(본 글에 포함된 내용은 창작된 소설의 일부분입니다. 따라서,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 등을 포함한 이 소설의 모든 요소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허구적 창작물입니다.)
서울의 화려한 밤은 언제나 그러했듯 찬란했지만, 그 겉치레 뒤에는 숨 막히는 암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었고, 그들 중 누구도 쉽사리 그 비밀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고층 빌딩의 차가운 유리창 뒤에서는 거대한 음모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엄모순은 자신의 제국이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삶을 지탱하던 것은 권력과 돈,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얽혀있던 수많은 배신과 음모였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 최대의 위기가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엄모순은 AB그룹의 회장으로, 그룹의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 희생에는 그의 가족, 친구, 그리고 그를 신뢰하고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가장 믿었던 사람들조차 그를 배신하려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엄모순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문서들이 쌓여 있었고, 그 중에는 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법적 전략들과 회의 기록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했다.
문득, 그의 비서 김탁기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긴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엄모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김탁기를 쏘아보며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 무슨 긴급 보고가 있는 거지?"
김탁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 엄모순은 그 서류를 받아들고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이 보고서는 오민형이 최근 손혜민과 다시 접촉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에서 회장님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모순은 서류를 던지며 크게 소리쳤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민형마저도…"
김탁기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회장님,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할 계획이십니까?"
엄모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는 무언의 손짓으로 김탁기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새벽 공기가 아직 싸늘한 그 시간, A부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찍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는 서울의 차가운 거리를 홀로 걸으며 머리를 맑게 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은 여전히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AB그룹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고,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한 A부장은 습관처럼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창가에 섰다. 도심의 풍경은 여전히 활기차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려 했다.
AB그룹의 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회장 엄모순의 이혼 소송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룹의 명성은 땅에 떨어졌다. 주주들과 임원들은 극도의 불안에 빠졌고, 부회장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A부장은 자신이 이 사태와 무관한 위치에 있을지, 아니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 이 혼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고 이 위기를 기회로 삼을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A부장은 몇 시간 동안 문서를 검토하며 현재의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그러나 문서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날 오후, A부장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를 돌려 강남의 한 고급 카페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카페 중 하나로, 외부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A부장은 이미 한 명의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김진호, 은퇴한 경영인으로, 과거 AB그룹의 브레인이었던 AB경제연구소의 전임 임원이었다.
A부장은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김진호를 발견했다. 김진호는 창가의 조용한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A부장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김진호 선생님."
김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A부장, 잘 지내고 있나? 최근 AB그룹의 상황을 듣고 조금 놀랐네."
A부장은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마세요. 그야말로 엉망입니다. 저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김진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며, A부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A부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게."
A부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AB그룹은 지금 엄모순 회장의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주주들은 물론이고 임원들까지도 불안해하고 있죠. 저는 이 혼란 속에서 선생님과 함께 그룹을 다시 세우고 싶습니다."
김진호는 A부장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은퇴 후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던 그였지만, A부장의 말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느꼈다. 그는 A부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경영에 나서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네. 대신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 그리고 자네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인물을 이용해야 할텐데, 그 인물이 자율권을 전적으로 보장받아야 하네. 내 방식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A부장은 그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선생님께서 원하는 방식대로 하실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다만, AB그룹이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김진호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좋아, 그럼 내가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해 보겠네. 현재 경영진 중에 한 명을 잘 설득해야 할 거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세."
그들은 악수를 나누며 비밀 동맹을 결성했다. 김진호와 A부장은 각자의 역할을 분명히 하며, 엄모순과 부회장들에 대한 반격을 준비해야만 했다.
A부장은 카페를 나서며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김진호와 함께라면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계획을 어떻게 실행에 옮기느냐였다.
그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화려한 불빛들이 그의 마음을 잠시나마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룹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에 대한 걱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내일부터 시작될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올랐다. 김진호와 함께할 새로운 동맹, 그리고 그 동맹이 가져올 변화는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A부장은 그만큼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는 AB그룹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결심을 하며, 결국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곳은 대한민국 경제계를 좌우하는 거대한 제국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외관과 달리, 내부에서는 엄청난 음모와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AB그룹의 회장, 엄모순이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경제계를 주름잡는 거물이었지만, 최근 그의 자리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 손혜민과 내연녀 오민형 사이의 권력 다툼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점차 깨닫고 있었다.
엄모순은 집무실에서 손에 쥔 USB를 바라보고 있었다. USB에는 손혜민과 오민형이 비밀리에 만난 영상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 영상을 이용해 손혜민을 협박할 생각이었다. 손혜민이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는 그녀를 먼저 공격하려 했다. 그는 손혜민이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며칠째 고민해도 그녀를 막을 방법은 이 협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엄모순은 결심을 굳히고, 손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냉냉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손혜민, 당신과 오민형이 만난 걸 알고 있어. 더 이상 날 속이려 하지 마."
그러나 손혜민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오히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오민형을 만났다고 해서 당신이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모순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영상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당신의 평판은 완전히 무너질 거야. 그리고 당신이 감추고 있는 비리들, 내가 다 까발릴 수 있어."
손혜민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냉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해봐. 하지만 당신도 기억해둬. 난 기자회견을 열겠어. 그 자리에서 당신의 모든 비리를 폭로할 거야. 내가 가진 증거들을 보면, 당신은 더 이상 회장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을 거야."
엄모순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기자회견? 당신이 정말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손혜민은 비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이 가진 게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가진 것들은 당신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 있어. 두고 보자고."
그녀는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엄모순은 전화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손혜민이 정말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비리를 폭로한다면, 이미 땅에 떨어진 이미지는 물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손혜민의 약점을 찾아내어 그녀를 막아야만 했다.
한편, 오민형은 자신만의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그동안 손혜민의 비리와 갑질에 대한 정보를 은밀히 수집하고 있었다. 손헤민이 이혼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후에도 자신과 자녀들의 지분을 약속받기는 했지만 언제 배신을 당할지 모르는 내연녀 신분은 그녀를 항상 불안에 쪄들게 했다. 까도 까도 속이 드러나지 않는 마법의 양파를 손에 쥐고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항상 그녀의 머리속에 암세포처럼 자라고 있었다.
오민형은 손혜민의 전 비서였던 김실장과 은밀한 대화를 기억한다.
"김실장님, 손혜민에 대해 아시는 것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당신의 협조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상이 있을 겁니다."
오민형의 눈빛은 날카로웠고,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김실장은 손혜민의 폭언과 갑질에 대해 상세히 증언했다. 방 청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릎을 꿇게 하고 욕설을 퍼부었던 일, 애완견 산책 중 개가 흙을 묻혔다고 개 목욕을 시켰던 일, 새벽 3시에 불러 회장 아들의 숙제를 대신 해달라고 했던 일 등 충격적인 사례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실장의 증언은 오민형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오민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AB호텔의 직원들과도 접촉했다. 호텔 지배인 박매니저는 손혜민의 호텔 내 행태에 대해 털어놓았다. 스위트룸에 명화가 걸려있지 않다고 난리를 쳤던 일, 조식으로 나온 딸기가 한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크타임에 주방장을 불러 세워 30분간 질타했던 일, 산펠레그리노를 서빙할 때 250ml 유리병이 아니고 플라스틱 병과 정확한 온도로 차가워진 크리스탈 잔에 따르지 않고 한번에 따르는 정확한 용량도 지키지 않았다고 직원을 해고하려 했던 일, 150만원을 호가하는 멀쩡한 와인을 상했다고 우겨, 소믈리에의 정체성과 영혼을 송두리째 짓밟고 실수로 뒤집어 씌워 몇 배의 더 고가의 와인과 빈티지 샴페인을 서빙하도록 협박한 일 등 손혜민의 갑질 사례가 끝없이 이어졌다. 땅콩 회황 사건은 명함도 못 내밀고 뒷걸음질 치고 도망갔을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서울 강남의 최고급 호텔 중 하나인 AB호텔. 손혜민은 이 호텔의 VVVVVIP 고객이었다. 그녀의 방문은 호텔 직원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그녀에게 시달려 그만둔 직원은 수십명인 데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전담 직원은 우울증에 시달리며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녀가 나타나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현기증으로 쓰러질 듯한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날도 손혜민은 호텔의 스위트룸에 투숙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스위트룸의 내부를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벽에 걸린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호텔 지배인 박 매니저를 호출했다.
"이게 뭐야?" 손혜민은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따위 그림을 걸어놓고 VVVVIP 대접을 하겠다는 거야?"
박 매니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손혜민 여사님. 즉시 다른 그림으로 교체하겠습니다."
그러나 손혜민은 그의 사과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교체? 그게 해결책이라고 생각해? 내가 여기 투숙할 때마다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당신은 이 호텔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줄 알아!"
박 매니저는 머리를 조아리며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그의 눈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그날 저녁, 손혜민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그러나 그녀는 서빙된 딸기를 보자마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이 딸기 크기가 한 입에 들어가지도 않잖아! 몇 번이나 얘기해야 해? 당신 아이큐 두 자리야?"
그녀는 바로 주방장을 불러 세웠다.
"이따위로 음식을 준비해서 손님에게 내놓으라고 누가 지시했어? 당신 같은 사람은 이 호텔에서 일할 자격이 없어!"
주방장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즉시 새로운 딸기를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손혜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딸기? 당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딸기’가 뭐가 달라지겠어? 나를 우롱하지 마!"
그녀는 서빙 직원에게도 눈을 돌리며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야! 산펠레그리노를 서빙할 때 온도가 정확하지 않았어. 250ml 유리병을 가져와야지 왜 플라스틱 병이야? 크리스탈 잔도 온도를 맞추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내가 이 잔 싫댔지? 브랜드까지 콕 찍어서 알려줬는데, 그리고 내가 잔에 반만 정확하게 따르랬잖아!"
서빙 직원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손혜민은 냉혹하게 말했다.
"당장 해고돼야 할 사람이 여기 있는 것 같군. 네가 서빙하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손혜민의 갑질은 호텔 직원들만을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 비서였던 김실장도 그 지옥 같은 삶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손혜민 여사는 매일 아침 저를 불러 무릎을 꿇게 하고, 청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한 번은 회장 아들이 숙제를 잊어버렸다고 저를 새벽 3시에 불러 대신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몸이 아팠지만,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김실장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말을 이어갔다.
"손혜민 여사는 애완견 산책을 시키면서도 늘 저를 불러 개를 목욕시키게 했습니다. 한 번은 개에 흙을 묻혔다고 해서 새벽에 저를 불러내어 목욕을 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한 번은 해외 출장 중에 자기 방에 전동칫솔을 두고 체크아웃을 했다고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 해결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저항할 수 없었고,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따라야 했습니다."
이곳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핵심 인물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장소였다. 오민형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엄모순은 이미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엄숙하고 긴장감이 감돌았다.
오민형은 불안한 표정으로 엄모순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렀다구요? 빌라로 오면 되지 왜 오라가라 난리에요?"
엄모순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민형, 내가 당신이 손혜민과 비밀리에 만났다는 사실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당신이 무슨 의도로 그녀와 접촉했는지 솔직히 말해봐."
오민형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언젠가는 들킬 일이었고, 들켜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저 생각보다 시기가 빨리 왔을 뿐이었다.
"오해에요. 난 그저 손혜민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신을 돕기 위한 정보를 얻으려 했을 뿐이라구요."
오라가라 한다고 앙칼지던 목소리가 어느새 순한양으로 변해 있었다. 이런 부지불식간의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순간이동 지식은 타고난 전략가의 면모였다. 특히 남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100개 이상의 톤과 전략은 어디서도 배울 수 없는 현장의 지식이 체화된 것으로 하루에도 100번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하는 듯한 그녀의 카멜레온 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엄모순은 그녀의 말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얻은 정보가 뭐지? 내가 믿을 만한 것이 있나?"
오민형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그동안 모아온 정보를 흘리기로 순간 결심했다. 어짜피 언젠가는 터트리려고 모아온 저축통장이었으니, 이 날을 위해 애써 모아온 것으로 하자고 결심한 그녀. 손혜민의 구린 모습들을 하나씩 펼쳐야겠다 직감한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파일을 꺼내 엄모순에게 건넸다.
"이건 내가 모은 손혜민의 갑질과 비리에 대한 증거에요. 그녀의 전 비서였던 김실장과 AB호텔 직원들로부터 얻은 증언이구요."
엄모순은 파일을 열어보며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김실장의 증언에는 손혜민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폭언과 갑질을 일삼았던 사례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방 청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무릎을 꿇게 하고 욕설을 퍼부었던 일, 애완견 산책 중 개가 흙을 묻혔다고 새벽에 개 목욕을 시켰던 일, 회장 아들의 숙제를 대신 해달라고 한 사례까지. 호텔비도 다 한 번 낸적이 없었다. 엄연히 횡령에 해당한다.
엄모순은 본인이 김탁기를 시켜 별도로 모아온 뮤제AB 비자금 및 횡령 정보는 일단 이번엔 쓰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아직 만기가 도래하지 않은 어음처럼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다 꺼내먹어야겠다 은근 순간을 즐긴다. 마치 계탄듯 순간 천국을 다녀온 엄모순.
'모든 패를 한 번에 깔 수는 없으니. 그리고 깔 필요도 없으니 더 큰 패는 나중에 한 방에 터트려야겠지. 이번엔 이걸로 협박하자' 엄모순은 조용히 속으로 되뇌었다.
오민형은 엄모순이 파일을 읽는 동안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녀는 이 정보를 통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엄모순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서있는 듯한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지만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엄모순은 파일을 다 읽고 난 후, 오민형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잠시 망설임이 있었지만, 곧 결단을 내린 듯 차갑게 말했다.
"좋아. 이 정보들이 사실이라면, 손혜민이 나를 협박할 수 없도록 잠시 시간을 벌 수는 있을거야. 일단 이걸 이용해 기자회견부터 막아야겠어."
오민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내가 그녀와 접촉하여 이 정보를 알리죠. 그녀는 이 정보를 알게 되면 기자회견을 열지 않을테니…."
다시 앙칼진 목소리 100단 기어가 10단으로 올라가 있다.
엄모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해. 그리고 이 정보를 퍼뜨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막아."
빌라로 이동하면서 오민형은 자신이 확보한 증언들의 일부와 사진, 동영상 일부를 손혜민에게 전송했다. 그리고 곧바로 손혜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혜민 씨, 저희가 만났던 이야기가 이미 퍼졌습니다. 당신이 기자회견을 열면, 방금 제가 보낸 이 모든 정보들이 함께 공개될 겁니다. 당신이 저지른 갑질과 비리들도 모두 제가 알고 있어요. 같이 모두 밝혀질 겁니다."
손혜민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오민형이 가진 정보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았다. 그동안 냉정하게 버려진 조강지처 코스프레로 힘없는 피해자 이미지를 아주 나이스하게 구축해온 손혜민. 엄모순과 오민형의 다정한 포즈가 언론에 공개되고 내연녀와 대기업 회장의 불륜이라는 프레임으로 이미지가 땅바닥에 추락한 엄모순에 비해 손혜민은 대통령의 딸이라는 신분으로 온통 머리부터 발끝까지 쇠사슬처럼 정신무장하고 독사의 혀와 같은 언론 플레이로 현실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말도 안되는 나이스한 이미지를 굳건하게 지켜온 그녀다. 이런 이미지가 한번에 실추된다면 대법원 상고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런 이미지 덕에 항소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오민형 씨, 당신이 이 정보를 공개한다면, 나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AB그룹 이미지도 함께 무너질 거라는 걸 알고 있나요?"
오민형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기자회견을 열어 엄모순의 비리를 폭로한다면, 이 모든 정보들이 세상에 공개될 겁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그 결과는 당신이 감당해야 할 겁니다."
손혜민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기자회견은 열지 않겠어.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니야, 오민형."
오민형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잠시 후, 엄모순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손혜민이 기자회견을 열지 않겠다는 군요."
엄모순은 그녀의 보고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잘했어, 오민형. 덕분에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
엄모순은 잠시 승리의 여유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오민형이 그의 명령에 따라 손혜민을 막는 데 성공했지만, 그는 그녀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그는 오민형이 아직도 손혜민과 연계되어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민형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기로 결심했다.
"오민형, 이제 손혜민의 상고심 전략을 알아와야겠어. 그녀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알아내. 그래야 우리가 다음 수를 둘 수 있어."
오민형은 놀라며 말했다.
"손혜민의 전략을 빼내오는 건 위험한 일이에요. 만약 발각된다면…"
오민형은 엄모순이 자신이 제공한 증거로 손혜민이 항소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한번에 내쳐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순간 공황장애와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엄모순은 냉정하게 말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일이다. 반드시 성공시켜라."
오민형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이렇게 된 마당에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손혜민의 상고심 전략을 알아내보죠."
엄모순은 그녀가 이 일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지 지켜보며, 새로운 음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민형을 이용해 손혜민에게 다시 접근시키고, 그녀의 전략을 빼내어 이혼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엄모순은 아직 오민형이 손혜민에게 제공한 증거가 항소심에서 결정적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사실은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전쟁은 이제 막 시작에 불과했다. 권력과 배신, 음모가 얽힌 이 복잡한 싸움에서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복잡한 게임의 말판 위에서, 각자의 숨겨진 동기와 비밀스러운 계획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민형은 엄모순과 손혜민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그녀의 내면에서는 욕망과 생존 사이의 갈등이 끊임없이 요동쳤다. 한편, 엄모순은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방법들을 고려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