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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훈의 중국평론 Jul 20. 2022

the beginning]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다

한중수교 30주년, 그 첫 번째 이야기


다가오는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고 왕래한 지 정확히 30년 되는 날이다.


한중수교 공동성명서에 서명 중인 이상옥 외무장관과 钱基琛 외교부장. 상호불가침, 중국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 한반도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원칙 등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있다.


30년 전 이 날, 별로 좋은 기억 없는 두 나라가 마주 앉아 “앞으로 우리 한번 사이좋게 잘 지내보아요”라고 그저 공존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꿈꾸며 아름다운 약속만 나눈 것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란다.


이 둘 사이에는 분명 자기들만의 이기적인 셈법이 있었고 그래도 되는, 그래야 하는 트렌드가 있었다.


일단 한국과 중국이 엮일만한 분위기는 몇 년간 충분히 무르익고 있었다.


1989년 12월, KGB나 CIA, 심지어 MI6까지 모두 한 번씩은 노후연금을 들춰볼만한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미소 몰타 정상회의’가 그것이다.


조지 H.W.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마주 앉아 40년 넘게 묵은 냉전의 종식을 선언한 것이다.


미국과 소련 정상들이 핵무기 발사 버튼을 가방에 담아 휴대해 다닐 정도로 으르렁거리던 그 대치는 그렇게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물론 그 이유에 순수하기 그지없는 양국의 평화에 대한 염원이나 인류애 따위가 있었을 리 없다.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분명한 입장과 속내가 있었다.


우선 소련은 공산주의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물론 자기들은 ‘전략적 후퇴’라고 자위하겠지만 말이다.


그간 전력을 다해 내세웠던 핵무기나 우주전쟁 따위가 인민의 피폐한 삶에 대한 분노를 잠재워주지는 못했다.


위기의 소련은 이미 고르바초프 서기장에 의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노선에 올라타 있던 터였다.


물론 중국에서도 덩샤오핑 총서기에 의해 선부론(先富论), 흑묘백묘론(黑猫白猫论)을 기반으로 마오쩌둥의 개삽질(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데미지에서 회복 중이었다.


선부론(先富论), 공부론(共富论)이 궁금하다면,


일단 좀 배불려 놓아야 이 무지막지한 수의 인민들이 언제든 벌일 수 있는 민란과 봉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해법을 깨달은 탓이다.


자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자본의 자유경쟁으로 경제를 부풀리고 산업 기술을 발전시킨 자유진영의 조력이 절실했다.


뭐 방법 있나. 꿇어야지.


냉큼, 당장, 털썩 꿇어앉아 자유진영의 경제에 사지를 벌렸다.


그렇다고 자유진영의 절대 주자인 미국이 승자의 관용만으로 이들을 포용한 것은 또 절대 아니다.


미국을 위시로 한 자유진영 국가들은 자유시장경제와 무역을 통해 비약적인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와중 나라의 곳곳은 지저분한 거품으로 들어찼다.


냉전의 시작을 알린 트루먼 독트린(우리 편에 붙으면 다 퍼주겠다던 자유 진영 스카우트 제안)으로 미국뿐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의 자유진영 국가들조차 온통 모래성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본시장이 기나긴 렉에 걸린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비정상적인 성장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 개 밖에 없었다.


하나, 지속적인 성장

둘, 전쟁


하지만 미국은 맛 들인 대리전쟁을 일삼다 베트남에서 너무 호되게 당한 터라 또다시 벌이는 전쟁은 국내의 반대 여론에 꿈도 못 꾸고, 지속적인 성장은 노답에 노답이라 있는 짱구 없는 짱구를 힘차게 굴리던 중...


웬 떡인가. 식구 많고, 땅 넓고, 자원 풍부한 소련에서 순순히 투항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 넓은 땅은 공장 부지로, 그 많은 인구는 노동력으로, 풍부한 그 자원은 생산원료로써 먼저 한번 굴리고,


이후 내 상품과 기술을 팔아먹을 시장으로서 재탕, 삼탕이 가능한 구원의 해법이 굴러들어 온 것이다.


그렇게 자기 욕심에 충실한 속셈으로 화해한 두 나라는 자유와 공산진영의 커플링을 국제적 트렌드로 만들었다.


1988년 취임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 트렌드에 발맞춰 잽싸게 ‘북방외교’라는 대외 정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1990년 9월에 소련과 우리 사이의 수교를 시작으로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까지 해내더니 1992년에 이르러 중국과의 수교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우리라고 계산이 없었을까.


당시의 한국 경제는 미국과 일본에 목줄이 걸려있는 꼬라지였다.


‘3저(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에 힘입어 한국의 수출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3저’가 끝나는 순간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높은 수출 의존도에 대한 위험이 있었다.


절대적 최다 교역국인 미국, 일본과의 무역수지가 흑자에서 언제든 적자로 돌아설 수 있는 외줄타기 호황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최적의 파트너 소련과 중국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니, 이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렇게 인구가 12억이나 되면서 GDP는 우리의 1.2배에 불과하던 당시 찌그러질데로 찌그러진 공산주의 국가 중국은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다.


30년이 흘렀다.


그랬던 중국의 GDP는 이제 우리의 9배가 넘는다.


우리의 대중국 수출의존도는 31%(홍콩 포함)에 달한다.


30년이라는 세월이 참 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다음에는 [한중수교 30주년, 그 두 번째 이야기] ‘지들 둘밖에 모르는 G2’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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