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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다 Oct 31. 2020

#07 초와 촛대

골동품점에 들어온 일곱 번째 물건



물건 주인의 말

외할머니께 물려받은 촛대예요. 저보고 항상 촛불 같은 사람이 되라며 건네주셨죠. 흔들려도 온기를 잃지 않고 촛불 같은 사람들을 만나 빛을 키워가라고요. 이 촛대를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의 촛불이 되어주세요.




가게 주인의 말

‘인연’이란 말을 믿어서일까? 실제로 얼굴 한번 보지 못했지만 왠지 꼭 만나야 할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학생이었는데 마침 작은언니의 결혼식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려 가족 모두 미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이건 그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는 신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에 언니의 결혼식이 끝난 후 무작정 하늘을 날아 LA 땅에 도착했다. 내가 아는 것은 사진을 통해 본 그 사람의 흐릿한 얼굴과 학교뿐이었다. 우선 여행 중에 현지인 친구를 구하는 펜팔 앱을 통해 그 사람과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 즉 내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줄 가이드를 찾아내었다. 약속을 잡고 만난 그는 나와 동갑인 유학생이었다. (이제부터 SH라 하겠다.) 아무래도 모바일을 통해 만난 사람에게 쉽게 경계를 풀 수 없었는데 SH는 참 순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미국 유학에 관심이 많은 척했더니 그는 흔쾌히 자신의 학교를 투어 시켜주겠다고 말했다.


의도를 숨기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설레는 ‘유학 대비 학교 투어' 즉 ‘본격적인 탐색’이 시작되었다. 가이드가 된 SH는 학교 식당, 도서관, 기숙사 등 이곳저곳 날 데리고 돌아다녀 주었고, 나는 구경한다는 핑계로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눈알을 열심히 굴려댔지만 드넓은 학교에서 그 사람을 쉽게 찾을 순 없었다. 그 와중에 SH는 자신의 역할에 책임감을 느꼈는지 자꾸 “사진 찍어줄게. 저기 서 봐.”라고 가만히 서있는 나를 부추겼다. 덕분에 투어 이후 남은 것은 학교 명소 앞에서 어색하게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평범한 여행객’의 기념사진뿐이었다. 다음 날, 혼자 다시 학교에 찾아가 봤지만 역시나 그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슬픔은 잠시, 남은 여행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가이드 SH에게 ‘일 끝나고 뭐 해? 오늘도 나랑 놀아줄래?’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퇴근 후 흔쾌히 나에게 와주었다. 그렇게 나의 일주일간의 여행 일정에서 사흘간을 그와 함께 보냈다. 원래 찾고 싶었던 사람은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만큼 SH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햇살을 받으며 자전거를 타던 순간인데 그중에서도 앞서 나가던 그의 등에서 바람에 펄럭이던 검정색 스시집 유니폼 티셔츠가 그러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서로에게 보다 깊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게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유학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느껴온 외로움, 그리고 학창 시절에 느낀 소외감에 대해서였다. 마주앉은 SH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난 애초에 내가 찾던 사람이 아닌 이 아이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닐까.'


저녁을 먹고 그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 중, 우린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그냥 내 머릿속에는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제 이 아인 못 보겠구나.라는 슬픈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내일 이른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하니 공항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말이었다.


“너 천사야?”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여행하는 내내 가이드 역할을 해주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물었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기를 자신도 여행을 갔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정말 고마웠던 적이 있어서 나에게 그 보답을 하는 거라고 했다. 그는 내가 처음에 경계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음 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내가 그를 만난 목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너랑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을 찾고 싶어서 널 만났어. 결국 내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괜찮았어?"

"응. 너랑 있는 게 정말 좋았으니까."

"다행이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공항 터미널에 도착한 후, 나는 전날 밤에 울먹이며 썼던 작은 편지를 그에게 건네고 마지막 포옹을 했다. 그 포옹 끝에 참았던 눈물이 터질까 재빨리 뒤돌아섰다. 정말 고마운 건 난데. 나도 낯선 누군가에게 너처럼 따뜻한 사람이고 싶다. 종종 촛불을 바라보며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빈다. 스스로에게 줄 온기도 모자라서 '이러다 얼어 죽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지만, 사람은 촛불과도 같단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서로의 흔들리는 빛이 전달되어 불을 지필 수 있다는 믿음. 나의 빛이 약해지면 타인의 빛에 힘입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우린 다시 보지 않을 사이였지만 함께했던 그 날들이 분명 따뜻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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