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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다 Oct 20. 2020

#06 빈티지 화분과 자라는 식물

골통품점에 들어온 여섯 번째 물건



물건 주인의 말


사과잼 병으로 만든 빈티지 화분이에요.

이 화분에는 무얼 심든 하나같이 무럭무럭 잘 자란답니다.




가게 주인의 말


어쩌다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을까.

어쩌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심심할 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게 되었을까. 어쩌다 이런 생각을 굳이 시간을 내어서 하는 사람이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선택들이 자양분이 되어서 나를 이렇게 자라게 했는지 생각해본다. 그럼 앞으로도 취사선택을 좀 더 잘해가며 자랄 수 있겠지라는 기대와 함께.


때는 바야흐로 유치원에 다녔을 때, 벽에는 화이트보드가 붙어 있었고 나는 주로 그 앞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면 애들이 한 두 명씩 와서 “우와, 이런 것도 그려줘.” 하며 자신이 보고 싶은 그림을 요청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아이와의 결혼식 장면 같은 것들이었다. 열심히 그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친구가 행복해하면 나도 덩달아 뿌듯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내 꿈의 씨앗을 심었다. 화가가 돼야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떡잎이 자란 나는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화가로 살면 웬만큼 성공하지 않는 이상 돈을 벌기 힘들 테니 유학을 떠나 있는 작은 언니처럼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분야의 디자인인지 구체적으로 정하진 않았다. 단지 사회에서 나의 역할은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이길 바랬다. 그렇게 미대 입시를 시작했다. 미술학원은 다들 어렸을 때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는 한 번씩 들어본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비슷해지는 공간 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모두 학원에서 가르쳐준 방식대로 스케치를 하고 색을 칠해야 했다. 시간 내에 완성을 못하면 복도에 차례로 서서 매를 맞았다. 맞기 싫은 우리들은 시험을 치르는 4-5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앉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붓질을 해댔다. 그럼 신기하게도 그림이 완성'은' 되었다. 이때마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왜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니. 너네가 짐승이니?

우리는 하나같이 얼굴이 구겨졌다. 길들여지지 말아야 할 그림들이 길들여지고 있었다.


한 편으론 모두 비슷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각자의 장단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일정하고 정확한 선으로 그려야 하는 건축물, 기계 등의 인공물을 그리기 어려워했다. 대신 선의 강약을 주며 그려나가는 인물, 자연물을 잘 그렸고 또 좋아해다. 나와 정반대인 사람도 있었다. 이 것은 그리는 사람의 성향이 그림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난 꽃꽂이를 하는 엄마 밑에서 항상 식물을 보며 자라기도 했고 물렁거리는 성향의 사람이라 자유로운 선이 저절로 나온다. 당시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선의 끝과 끝이 만나게 그려야지.

-그림을 깨끗하게 그려라.


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그 점은 입시 시험날까지 완벽히 고치지 못했다. 그렇게 미술학원에서 보낸 3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안전빵으로 넣어놓은 한 예술 대학의 비실기 전형으로 합격하게 되었다. 당시 예술대학 입학전형에 무지했던 나는 여러 학과를 동시에 지원해도 되는 줄로 착각하고 학과 선택란에 가나다순으로 배열되어있는 학과들 중 첫 번째로 뜨는 ‘광고 브랜드 디자인과’부터 지원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하나의 학과만 지원 가능했고 가장 가고 싶었던 ‘ㅅ’으로 시작하는 과는 아예 지원도 못했다. 사고인 건지 운명인 건지 그렇게 의도치 않은 학과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업으로 삼아야 할지는 항상 의문이었다. 전공과 달리 영화나 뮤직비디오도 만들어보고 싶고 인테리어 디자인도 해보고 싶었다. 한정적인 학과의 커리큘럼 안에서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는 스스로가 답답해졌다. 우선 뭐라도 경험해봐야지 답이 나오겠다는 생각에 1년 휴학을 신청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단편영화도 만들어보고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스텝으로 일하는 등 하고 싶었던 것들을 원 없이 경험했다. 그래서 진로를 정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대신 그 시간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그저 한 직업의 멋진 단면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무슨 일을 하던 힘들 일이 있을 텐데 그럼 가장 견딜 수 있는 힘듦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복학을 하니 예전처럼 내 미래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 길을 어찌어찌 잘 나아갈 것이라는 여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지금은 전공을 살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때의 생각처럼 일이란  매일 재밌지도, 매일 힘들지도 않다. 그래도 유치원에서 친구에게 그림을 그려주었던 때처럼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뿌듯함을 느낄  있으니  정도면  잘한 선택이지 싶다. 최근에는 창작자들이 많은 동네로 이사를 왔다. 스스로 머물 공간을 선택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온전히  공간의 주인이 되고 나서야 해보고 싶었던 인테리어를  작은 방에서부터 시도해보는 중이다.   편으로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피어올라서 이렇게 글을 쓰며 입시가 끝나면 손도    같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다. 여전히 입시  지적받았던 단점은 고치지 못했다. 아니, 고칠 필요가 없었다. 입시가 끝나고 나니 그건 단점이 아니라 개성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들을  해나갈지 모르겠지만,  선택들이 부디 누가 보아도 그럴듯한 것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껍데기 하나를 벗는 일이기를 바란다. 나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일이기를 바란다. 말은 쉬운데 실천하기 참 렵다. 내가 자라왔던 모습과 앞으로 자라나  모습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보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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