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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다 Oct 13. 2020

#05 크랙 무늬가 있는 유리 고블렛

골동품점에 들어온 다섯 번째 물건

물건 주인의 말


이 고블렛 잔의 매력은 하단에 깨진 것처럼 크랙 무늬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잔을 더 오래 바라보게 돼요. 무얼 따라 마시던 그 시간을 한층 분위기 있게 만들어주죠. 금이 가서 물이 샐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단지 무늬일 뿐입니다. 내구성은 웬만한 유리잔보다 더 튼튼해요.  



가게 주인의 말


15년 동안이나 알아온 친구가 몇 개월 전까지 우울증을 겪었다는 것을 이번 연도에 들어서야 알았다. 이해하지 못할, 아니 이해하려면 슬퍼져서 감히 엄두가 안나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서로의 빈틈을 완벽히 알지 못한다. 그런 각자의 약점을 듣고 있다 보면 '고민이 있다는 건 다 똑같구나. 내 사정이 별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없으며 그 필요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받아먹고살아서 그렇게 비슷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재잘재잘 따뜻한 말들을 서로의 귀에 속삭이는구나 싶다.  


그 친구가 우울감이 심했을 땐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잦았다. 즐거워지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피하고 싶어서 술을 마시는 것 같았다. 난 그 모습이 처량해 보여 술 좀 적당히 마시라고 말하곤 했지만 듣기 지겨운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슬퍼 보이니깐 그만 마셔.”라고 해야 하나. 너무 동정하는 것처럼 들리진 않을까. 약해진 사람에게 하는 위로는 어렵고 그 사람이 망가져가는 모습을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것은 더 어렵다. 친구가 말하길,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날로 변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그 말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스스로 변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땅으로 파고드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하고 고독을 만드는 사람들. 그런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 옆에서는 나까지 우울해졌다. 그의 힘듦을 알면서도 옆에서 도와줄 수 없는 나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싫어지게 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더 이상 이어나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관계는 결국 끝이 나고야 말았지만. 아가페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의 힘을 주는 사람이 나타나 그 사람을 치유할 수 있을까? 하지만 스스로 채워야 하는 결핍을 채우지 못하면 그 힘을 받을 손을 내미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채워야 할 결핍을 타인이 채워주길 바랄 때 사람은 점점 더 공허해지는 것 같다. 마치 깨진 유리컵에 물을 붓는 것처럼.


예전의 나는 그 속을 내가 채울 수 있다고, 그럼 타인이 변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멍청이가 따로 없다. 유리를 모두 녹여 새로운 컵을 만들지 않는 이상 깨진 틈 사이로 물은 계속 샐 것이다. 스스로 바뀌려는 의지 없이는 사랑이고 위로고 물이 닿으면 접착력이 금방 떨어지고 마는 임시용 테이프일 뿐이더라.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은 사람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는 노력은 굳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럼 멀어질 사람은 자연스레 멀어지고 나랑 맞는 사람은 자연스레 이어진다. 바르고 예쁘고 완벽한 인간관계는 나의 욕심이다. 각자의 사정이 있으니 모든 빈틈을 일일이 메꾸려 하지 말자.  


이어 '어떤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귀 기울여 주어야 할까?'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이 의문에 답을 낸다 해도 감정적인 내가 모든 관계를 이성적으로 맺고 끊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단지, 사람을 만날 땐 춤을 추듯이 하고 싶다는 것. 내가 나아가는 공간에 상대의 스텝이 물러나듯 서로에게 공간을 내어주며 발 스텝이 엉키지 않는 사람과는 오래 춤을 출 수 있겠지. 같은 장르의 춤을 추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즐거운 춤이 되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내가 차차차를 추고 싶은데 발레만 추는 사람을 만나 서로의 발을 계속 밟게 된다면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빌며 유유히 퇴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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