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점에 들어온 여덟 번째 물건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의 조각상입니다. 할아버지와의 연애 시절에 할아버지가 직접 할머니를 보며 만들어주셨다고 했어요. 머리 윗부분이 깨져있는 이유는 할머니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할아버지를 떠났던 날, 할아버지가 바닥에 내동댕이 쳤기 때문이죠. 남은 부분만 대충 보면 아름다운 비너스 같지만 보는 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자세히 보아야만 볼 수 있는 디테일들이 있어요. 예를 들면 살짝 휜 매부리코라든지, 오른쪽 볼의 파인 보조개라든지. 이 물건을 사 가시는 분께는 석고상의 작은 부분, 더 나아가 사라진 부분까지 볼 수 있는 혜안이 함께 가기를 바랍니다.
살면서 몇 번의 오해를 주고받았더라? 생각보다 인간관계에서 오해라는 건 본지 하루가 되었는 몇 년이 되었든 피할 수 없었다. 특별히 잊히지 않는 몇 가지 일들이 있다.
한때 만났던 남자 친구(이하 ‘그')와 나의 친구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였다. 대화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분주히 짐을 챙기던 중 한 예쁜 친구의 핸드폰이 물이 담긴 싱크대에 떨어졌다. 마침 싱크대 옆에 서있던 그는 “혹시 내가 떨어뜨린 건가? 문제 생기면 연락 주세요. 허허. ”라고 능글맞게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 그리고 난 그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에게 살기가 담긴 카톡을 보냈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 친구 번호가 궁금하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
다른 건 몰라도 저 ^^ 표시를 보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그는 문학상 준비를 하며 단편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일어나자마자 내가 보낸 카톡을 읽은 그는 말했다.
“무서워. 소설은 내가 써야 할 게 아니라 네가 써야겠다. 바로 등단할 수 있겠어.”
하지만 난 그의 말을 완벽히 믿지 않았고 며칠 후에서야 같은 자리에 있던 다른 친구의 증언 덕분에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핸드폰 너네 오빠가 친 게 아니라 걔가 겉옷 입으면서 자기 팔로 쳐서 떨어진 거야. 내가 봤어.”
그 말을 듣고 난 '안도감과 기쁨과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섞인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반대로 어이없는 오해를 받았던 경험도 있다. 대학생 때 한 디자인 공모전에서 입상하고 상금을 받았던 날, 포에버 21에서 3만 원 정도 하는 화려한 목걸이를 첫눈에 반해 사버렸다. 다음 날 그 목걸이를 한 나를 발견한 한 동기는 과실에서 소리치며 말했다.
“ 얘 상금 받은 거 다 목걸이에다 썼다!”
농담이 참 재미있었다. 하지만 내가 다른 공모전도 준비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자 그 동기는 아까보단 좀 더 날카롭게 “ 너 돈독 올랐냐?”라고 말했다. 재미가 없는 건 고사하고 재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용기가 없는 일을 시도하는 사람을 보고 시비를 거는 자격지심으로 보였을 뿐.
지금까지 말했던 일들이 일방적인 오해라고 한다면 서로 간의 입장이 달라서 생기는 상대적 오해도 있다. 이런 오해들을 줄이려면 어쩔 수 없이 “세상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며 사회화를 하는 것이 고독사를 면하기 위해 필요하다. 때론 오해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해의 화살은 상대방을 가리키는데도 불구하고 방패를 자기에게 씌우기 쉽다. 그렇게 되면 “미안하지만 난 원래 이런 결핍을 가진 사람이니깐 널 오해한 것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어.”라는 말과 함께 오해받은 사람이 이해까지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자신의 상처가 남에게 무기가 될 순 없는 법. 설령 내가 혹은 누군가가 그 무기를 휘두르려는 조짐이 보인다면, 그 사이는 당분간 멀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애써 이해해보려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이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섣불리 오해하지 않고 굳이 오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도란도란 무난히 살고 싶다. 커가면서 인간관계가 좁아진다는 것은 '덜 오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이 아닐까. 석고상 머리 안에 뇌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관계를 오해없이 최대한 선명히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