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동품점에 들어온 열 번째 물건
맥주가 사람이라면 낭만주의자 일거예요. 주변의 평범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거든요. 맥주를 좋아한다면 맥주병 모으시는 분도 분명 있으실 텐데 그분의 손에 닿길 바랍니다.
주종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고르라면 맥주. 맥주는 맛있다. 꼭 술자리가 아니어도 집에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어 친근하다. 맥주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아마 유치원에 다닐 때쯤, 부모님의 친구분들이 놀러 오셔서 거실에 큰 상을 펴놓고 술판이 벌어진 때였다. 어른들 중 한 분은 꼭 나에게 "다희도 술 한잔 해볼래?" 라며 유리컵에 맥주를 조금 따라주시곤 하셨는데 어린 나는 그 한 모금이 웬만한 음료수보다 맛있었다. 그때부터 아줌마,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모이실 때마다 거실로 나가 맥주를 얻어 마시곤 했다. 따라주신 맥주를 꿀꺽꿀꺽 마실 때마다 어른들은 "어머, 얘 좀 봐라." 하며 귀여워해 주셨다. 그럼 나는 한번 더 따라 달라고 빈 컵을 내밀곤 했다.
한 때는 자기 전에 맥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에 1일 1 맥주를 실천하던 때도 있었다. 마신 맥주병과 캔들은 버리지 않고 싱크대 위에 전시해두었는데 그중에는 세계맥주집에서 친구가 마신 병까지 가방에 넣어 가져온 것도 있었다. 집에 처음으로 놀러 오는 친구들은 줄 세워진 빈 병과 캔들을 보고 "이거 다 네가 마신 거야...?" 라며 놀라 물었다. 싱크대를 가득 채운 수집품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너무 주당 같아 보인다.'는 생각에 캔들을 따로 모아 싱크대 아래로 숨겨 놓았다. 버리기엔 뭔가 아쉬웠기 때문이다. 이번에 독립하면서 모두 버리긴 했지만 그들의 사진을 보면 아쉬워지는 건 여전하다. 예쁜 거 몇 개는 남겨둘걸.
아무튼 전시된 맥주 중에 가장 맛있었던 맥주를 뽑자면 프랑스 옹 플뤠르에서 만난 '트리펠 카르멜리엇'이라는 맥주다. 벨기에의 카르멜리엇이라는 수녀원에서 만들어진 맥주라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당시 빡빡했던 투어 일정 때문에 지쳐 있었던 내게 생명'주'처럼 다가온 존재였다.
2018년도에 친구들과 술을 주제로 한 전시를 준비한 적이 있었는데 각자 다른 주종으로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맥주를 선택했다. '낭만酒의'라는 작품명으로 그동안 모아놓은 맥주병과 캔을 촬영하여 만든 콜라주 작품과 맥주를 의인화하여 써 내려간 몇 개의 글들을 함께 전시했다. '낭만酒의'라는 작품명을 선택했던 이유는 '맥주가 만약 사람이라면 낭만주의자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맥주를 마실 때는 주변의 평범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 때문이었다. 작품과 더불어 디스플레이용으로 '낭만주의'라고 쓰인 맥주 라벨도 함께 디자인했다. 가상의 맥주는 총 3종이었는데 첫 번째는 '시원한 밤공기' 맛 , 두 번째는 '차분한 달빛' 맛, 세 번째는 '우연한 행운' 맛이었다.
시중에 호가든 맥주병을 사다가 기존 라벨을 칼로 떼어내고 직접 만든 라벨로 바꿔 붙이니 좀 그럴싸해 보였다.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인지 작업을 하는 시간 내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 졸업작품도 이렇게 열정을 담아 하진 않았는데.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것은 그 마음만큼의 열정을 불러오는가 보다. 깊이 좋아하는 것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음 생에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선택할 수 있다면 1순위는 독일이다. 대다수의 독일 사람들은 맥주를 물처럼 마신다. 물이 심지어 맥주보다 더 비싼 경우도 있다. 회사 점심시간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사회는 너무나 이상적이다. 이렇게 맥주를 좋아하니 펍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수제 맥주를 만드는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맥주를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더 큰 정성과 시간과 비용을 요했다. 수업의 결과로 맛있는 수제 IPA와 "맥주는 즐겁게 마시기만 하는 걸로 하자!"라는 결심을 얻었다. 보람찬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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