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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Nov 20. 2024

이번 정류장은 교대-법원, 검찰청-역입니다.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01.

“이번 정류장은 교대-법원, 검찰청-역입니다.”

구성진 우리 가락과 함께 정류장 안내 멘트가 흘러나온다. 이번 역에서 유독 환승역 알림 음악이 너무 크게 들려 귀에 거슬린다.


왔다. 결국 내가 여기에 왔구나.


11월. 교대역 뒷골목의 우거진 나무에서는 낙엽이 떨어지고, 길 위에서는 난색계열 낙엽이 햇빛을 반사하며 그야말로 '눈이 부시게' 빛난다. 하릴없이 나의 결혼식 날의 풍경이 겹쳐진다. 야외 예식장은 아니었지만, 통유리로 된 식장 전면에는 가을 단풍이 가득한 나무들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눈부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 햇살에 반사되는 단풍 잎사귀. 그야말로 식장 안은 가을 그 자체였다. 그 풍경을 향해 버진로드를 걷던 나는 지금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고즈넉한 교대역 골목길을 홀로 분주히 걷고 있다. 지도 앱을 켜고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길을 찾아 골목에 접어들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다.

'여기 지나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변호사이거나 변호사를 찾아온 사람들이겠지. 나처럼.'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대행 서비스’를 이용한다.

발레파킹이라 불리는 주차대행 서비스부터, 포장 이사 서비스, 청소 대행 서비스, 장보기, 집안일, 강아지 산책 대행 등. 이토로 많은 대행 서비스는 모두 내가 나의 시간과 노력을 덜기 위해 내 의지로 선택하는 것들이며, 대체로 삶의 질을 높여준다. 그런데 이혼을 하기 위한 이혼 절차 대행 서비스를 맡기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내 마음은 뭔지 모를 억울함 내지는 패배감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발레파킹 전용 레스토랑에서 내가 정차한 상태 그대로 시동만 끄고는 발레비용이랍시고 몇 천 원을 받아갔을 때와 같이 억울한 느낌이랄까. 왜 내 결혼을 끝내기 위해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전투는 오롯이 나의 몫일 텐데.

지극히 사적일 뿐 아니라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굴욕적인 이야기임에 틀림없을 것들을, 나를 수임료나 성공보수 이상으로는 보지 않을 것이 거의 분명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털어놔야 한다는 사실이 내가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보다 나를 더 치욕스럽게 만든다. 성공적인(?) 이혼을 하기 위해 그간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드러낸 적 없던 내 치부를 방금 처음 만난 변호사에게 까발려야만 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함과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이혼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또 그런 일로 돈을 버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안 그래도 원망스럽던 세상이 한 층 더럽게 느껴진다. 이 나라에서 결혼하는 사람들의 3분의 1이 이혼을 한다는데,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엇비슷한 경험을 했으려나 생각하니 위로가 되기는커녕 세상은 과연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나의 다음 일정까지는 딱 두 시간의 공백이 있다. 나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이혼과 스타트업 창업-을 앞두고 있는 애엄마다. 회사에 다니며, 밤새 이유 없이(물론 이유야 있겠지만 나로서는 당최 알 수 없는) 가끔씩 잠에서 깼다가도 최종적으로 새벽 6시에 깔끔하게 기상하는 갓 돌 지난 아이를 키우는 와중에 틈틈이 밤새워 창업을 준비하는 워킹맘이다. 이런 내가 요즘 들어 조금은 시간적 여유가 생겨 이렇게 이혼 소송까지 준비하게 됐을까? 하는 비아냥 뒤에는 썩어빠진 미소가 딸려온다. 이런 나의 신세를 비아냥거리기도 이제는 지친다. 나는 지금 매일 거의 4시간 남짓 자는-그나마도 가끔은 몇 번씩 깨며- 잠을 2-3시간으로 줄여가면서라도 이혼을 하겠다 결심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그래. 이혼과 이혼녀, 몸이 부서져라 사는 슈퍼 워킹맘 아니 슈퍼 싱글맘까지는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이혼 소송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비참한 내가 이 비참한 상황을 창조해 낸 나 자신과 나의 처참한 인생에게 묻는다. 협의 이혼이라는 것도 있는데,  많이들 그렇게 이혼한다는데.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자주 나오는 그런 장면들 있지 않은가, 

“이혼해! 도장 찍어!”, “몇 월 며칠 몇 시에 법원 앞에서 만나” 등과 같이. 

이런 건 부부가 상호 협의를 통해 이혼신청서를 제출해서 이혼에 이르는 협의 이혼이다. 그런데 대체 나는 왜 이혼 소송까지 해야 하는가. 소송 제반 비용으로 큰돈을 쓰는 것보다 싫은 것은 남에게 내 치부를 드러내고 구구절절이 나의 상황을 알려야만 한다는 것이고, 그게 소송에서 이기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과, 이런 것들 보다도 더 살 떨리게 싫은 건 지금같이 바쁘고 중요한 시기에 내 시간과 노력과 주의력을 이혼 소송 따위에 낭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출산 직후 모유수유를 하던 시절부터 회사에 복직한 지금까지 피땀 흘려 창업을 준비해 왔고, 시드 투자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나에게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돌보고 가꾸고 키워야 할 두 가지 생명-내 아이와 내 사업-이 있다. 이 둘 모두에게 지금 현재는 너무나 중요한 시기라 내가 시간과 정성과 관심과 노력을, 그야말로 내 인생을 갈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들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내느라 잠을 줄여서 미친 듯 집중하지 않으면 둘 중 어떤 것도 제대로 케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혼소송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러한 생각 말미에 찾아든 생각. 내가 지금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이유 세 가지-육아, 창업, 이혼소송-는 모두 다 남편이란 작자가 원흉이다. 그와 백년해로를 꿈꾸며 결혼하여 단 꿈에 빠져 허우적대던 신혼 2개월 무렵 나는 아이를 가졌고, 그의 무능력함으로 나 스스로 가정을 일으키고자 창업을 시작하게 됐으며, 이혼 협의 과정에서 그가 순순히 협의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부렸기에 이혼 소송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래, 평탄하고 순탄하기만 했던 내 인생이 꼬여버린 건 너와 결혼하면서부터이다. 나는 이 잘못된 매듭을 반드시 끊어낼 것이고, 끝까지 협의 이혼을 거부한 너로 인해 기어코 소송까지 하게 되었으니 네가 그토록 원하던 소송을 통해 너를 산산이 부숴버릴 것이다.


이렇게 의지를 다지니 터덜터덜 걷던 나의 발걸음에 달싹 힘이 실린다.


"띠링-"

지도 앱의 길 찾기 안내가 막바지로 접어들 때쯤 캘린더의 일정 알림 메시지가 상단에 표시된다.


'오늘 - 결혼기념일'


오늘은 나의 두 번째 결혼기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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