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기념일에 이혼하기 04.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직원을 통해 전달받은 '조정신청서.docx' 문서 파일을 열고 가만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커리어와 직업의 특성상 십 수년간 문서 작업을 수도 없이 해왔다. 하지만 혼인 파탄의 과정과 이혼 사유를 이렇게 문서로 작성할 날이 올 줄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런 것들을 글로 써야만 하는 사람 또는 인생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했다.
'짜잔, 여기 내가 있지롱. 아우 멋져. 정말 대단해. 이제 뭘 쓰다 쓰다 이런 것도 쓰네? 대단하다, 000!'
이놈의 자기 비하를 가볍게 넘어선 살인적인 비아냥은 어떻게 된 것이 이토록 깊은 새벽에도 잠들 줄을 모를까.
나는 두려운 전투를 앞둔 장수의 비장함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내가 이 글로써 또 얼마나 더 큰 수치를 당해야 그와 나는 비로소 남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진정 그동안 '이혼'이라는 것을 너무도 우습게 봐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인정해야만 했다.
그 순간 내 눈이 가닿은 곳에서 나는 스크롤을 멈추었다.
2. 이혼 신청에 대하여
가. 결혼에 이르기까지
아니, 이혼 신청을 하는데 '이혼에 이르기까지'도 아니고 '결혼에 이르기까지'를 작성해야 한다고? 나의 머리는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을 테니 그 내용도 필시 필요하겠지,라고 금세 납득을 했지만, 새벽이라 이성보다 더 우세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나의 감성이 울부짖었다.
'싫어! 죽도록 이혼이 하고 싶다는 사람한테 어쩌다 결혼을 하게 됐는지, 그 사랑에 눈이 뒤집혀 모든 것을 무릅쓰던 시기를 다시 떠올리라니! 너무 잔인하잖아!! 싫어! 싫다고!!'
나는 이것이 혹시 이혼하려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교묘히 괴롭힘으로써 결국 그 사람이 이혼에 백기를 들게 만들고자 하는 사법부의 고도의 술책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일 조정 신청서를 쓰도록 강요하는 행위가 차라리 이혼하지 않겠다는 자백을 하도록 고안된 신종 고문이라면, 가사재판부는 그야말로 고도의 고문 기술자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나, 나는 이미 고문과 견줄 만큼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경험한 바, 사법부의 어떠한 고문이나 책략에도, 더 나아가 앞으로 경험할 어떠한 능욕에도 굴하지 않으리라. 살을 찌웠으면 살을 빼기 위해 배가 주려야 하고, 숨이 넘어가고 근육이 찢어지도록 운동해야 한다. 늦잠을 잤으면 구두 신은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뛰어야 하고, 투자로 돈을 잃었으면 손실 보전을 위해 투잡이라도 뛰어야 한다. 도무지 함께 살 수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감내해야만 한다. 일을 그르친 대가는 어떻게든 치러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이혼을 통해 다시 한번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그리 오래되지도, 그리 길지도 않지만 화염 방사기 수준의 화력을 자랑하던 나의 연애사를 떠올려 보았다.
나와 남편은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호에 사는 부모님 댁에 각각 늙도록 얹혀살던 5층 여자와 14층 남자였다. 3년 넘게 그 아파트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어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입주 초반에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서 만나 차차 친분을 쌓게 된 우리의 엄마들은 나이와 종교가 같다는 공통점으로 시작해 티타임 명목으로 서로의 집을 자주 오가며 수다를 떨 정도로 급속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후 남편의 형과 나의 남동생이 같은 학교 같은 과 선후배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마들은 서로와 서로의 집에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는 각자가 보유한 나이대가 비슷하고 처치 곤란인 것도 비슷한 노총각 아들과 노처녀 딸을 서로에게 떠넘김이 어떨지에 대한 논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차마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주민들끼리 감히 아들 딸을 소개해줄 용기는 없어 그저 동네 동갑 주민 친구로서 순수한 우정만 쌓아가던 엄마들은, 그 후 3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도통 각자의 아들과 딸이 결혼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급해진 마음에 큰 용기를 내어 결국 자녀들 간의 만남을 추진하게 되면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남녀가 소개팅을 하게 되면, 첫 만남에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처음 만나, 동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헤어지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후 데이트를 하게 된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나서(꼭, 반드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지고, 야근 등으로 데이트할 시간이 없을 때는 잠깐 지하 주차장이나 아파트 놀이터에서 만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단점이라면 싸우고 연락 두절한 채 집에 틀어박혀 상대에게 내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듯한 위기감을 주고 싶어도 별로 넓지 않은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가 나의 소재지를 명확히 밝혀주는 바람에 상대에게 사라져 버림에 대한 공포를 줄 수 없다는 것과, 간밤에 ‘내가 너랑 기필코 헤어진다’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도 아침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상대방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만면에 미소를 장착한 채 살가운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휴일에 떡진 머리를 하고 늘어진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잘 차려입은 상대의 부모님을 마주치는 것 등이 있다.
지하 주차장에서 처음 만난 남편은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가장 장난을 잘 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이나 가슴에는 삶에 대한 회의라던가 심각함 또는 우울함과 같은 것들이 도통 자리를 잡을 수 없는 듯했다. 걱정이나 고민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한숨만 푹푹 나오는 회사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며 답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는 남편의 그 밝디 밝은 에너지에 매료되었다. 실제로 남편은 '우울한' 기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마치 봉황이나 유니콘, 피닉스 등과 같은 전설이나 신화 속 생명체를 만난 것만 같았다. 나와 데이트를 할 때면 마치 비서실장처럼 완벽하게 데이트 계획을 세우고는 아이같이 천진한 모습으로 나타나 실없는 농담을 쉴 새 없이 해대는 모습에 나는 웃겨서도 웃고 어이가 없어서도 웃고 행복해서도 웃었다. 나는 30대 중반의 내 인생을 돌아볼 때,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있었던가에 대해 그를 만날 때마다 자문했고, 대답은 항상 '아니다'였다. 나는 남편과 사랑에 빠졌던 그때가 적어도 당시까지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다.
어쨌든 결혼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아 늙어 죽을 때까지 부모님 댁에 얹혀 살 수도 있겠다는 크나큰 공포감을 각자의 부모님께 선사하던 우리는 서로를 처음 만난 날 결혼이라는 꿈을 갖게 되었고, 그 꿈을 열렬히 지지하는 양가 부모님들의 응원 내지 부추김으로 만난 지 1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의 머리가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들을 떠올리니 내 가슴도 어쩔 수 없이 그때 그 순간으로 살며시 돌아갔다. 나와 그는 우리의 만남을 신비롭게 여겼고, 서로를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가 내 또 다른 자신 같이 소중하기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나의 자식같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우리는 이렇게, 늦은 나이에 하루만 못 봐도 안달이 나고, 서로가 없이는 죽고 못 사는 주책스러운 연애를 하며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결혼 후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잠시 과거의 열띤 사랑의 감상에 젖은 채 이혼 조정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지금껏 열심히 작성했던 모든 문장들에 취소선을 긋고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날 새벽, 나의 다디달고 뜨거웠던 연애사는 참회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