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03.
그 AI 비서 같은 대표 변호사는 내게 소송으로 가기 전에 먼저 조정 이혼으로 진행해 보자고 제안했다. 아무래도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두 사람이 대화로 민감한 사항들에 대한 협의를 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으니 양측의 변호사들이 각자의 의뢰인의 입장을 전달하고 요구사항을 절충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소송은 길면 몇 년이고 늘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상대의 유책사유를 입증하기 위해 결국 진흙탕 싸움이 되곤 하는데, 그렇게까지 가기 전에 조정 신청을 통해 양측 변호사들끼리 적당한 타협안을 도출하는 것이 조정 이혼이다. 조정 이혼은 양측이 합의만 되면 첫 조정 기일에서도 이혼이 확정될 수도 있기에 쉽고 빠르게 이혼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조정을 하든 소송을 하든 비용은 동일하니, 일단 조정 시도를 해보고 조정이 성립되지 않으면 그때 소송을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그 인간미라고는 쌀 한 톨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녀가 걸맞지 않게 고객의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 주고자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조정 이혼을 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같은 비용을 받고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소송을 하는 것보다 조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본인이나 사무실 입장에서 '개이득'이기에 제안한 것이었다.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될 수도 있으니 몇백만 원에 이르는 수임료를 받되, 그전에 조정으로 끝나면 '땡큐'라고나 할까. 내가 지금껏 살면서 이용했던 수많은 대행 서비스들 중 과연 이런 식으로 서비스 비용을 계산하는 사례가 있었던가 떠올려 보았다. 일반 가정집 청소 서비스를 맡기는데, 혹시나 집 어딘가에 곰팡이나 찌든 기름때가 있을 수도 있으니 비싼 특수 청소 비용까지 포함된 금액을 받고, 실제로 청소하러 가서 집이 깨끗하면 특수 청소 없이 일반 청소만 하고 비용은 돌려주지 않으니 '땡큐'. 세상천지에 이런 셈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뿐 아니라 나에게도 조정 이혼이 이혼 소송보다는 몇 배나 좋은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2년 살고 이혼하는 마당에 같이 살았던 시간과 비슷한 또는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조정 이혼을 순순히 수락하기에는 너무도 울화가 치미는 포인트가 있으니, 바로 내가 남편(이라 불리는 인간)과 마주 앉아 대화로 요목 조목 협의를 하면 될 일에 수백만 원을 써서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 인간(같지 않은 남편)과 대화 자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인간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며, 심지어 서로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우리는 도무지 대화라는 것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갈라서기 위해 꼭 필요한 대화를 대신 좀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남편과 나 각각 수백만 원씩 도합 천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의 서비스 이용료를 지불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이렇게 생각하니 2년 간 징그럽게 반복했던 말싸움의 패턴이 떠올랐다.
어떤 이유로 그와 나 사이에 불꽃 튀는 설전이 시작된다.
일단 말싸움이 시작되면 내 말에 단 한마디도 그저 수긍하는 법이 없는 그에게 슬슬 분노가 치밀며 설전은 곧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그리고 그는 그 절정의 순간에 언제나, 항상, 예외 없이, 늘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러면 나는 본래 말싸움의 이유보다 이 신성한 설전에 대한 그의 불경한 태도에 더욱 분노함과 동시에 내가 지금껏 대화했(다고 믿었)던 생명체가 과연 '사람'이 맞기는 한가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제시한다. 물론 한층 격앙된 목소리로.
순간적으로 높아진 데시벨에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아직도 꿈을 꾸는 듯 몽롱한 표정으로 '아 그래 너 잘났다, 알았다, 알았다고. 너는 항상 옳지.' 등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추임새로 나의 타오르는 분노의 화염에 기름폭탄을 투하한다.
여기까지 떠올리자 그 꾸벅꾸벅 졸고 있던 머리통을 주먹으로 한 대 가격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쥐었던 주먹에 힘을 풀며 되뇌었다.
"그렇게 졸지 말고 영원히 잠들지 그래?"
날강도스러운 AI 비서의 서비스 대행료 셈법이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병들지는 않았지만 만날 조는 닭이건, 어쨌든 가장 중요한 건 하루라도 빨리 이 이혼을 마무리 짓는 것이기에 나는 수임료가 아깝더라도 조정 신청을 진행하기로 했다. 물론, 상대방(맨날 조는 건강한 닭)도 소송 대신 조정으로 진행하는 것에 동의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긴 하다. 나는 그 병들지도 않았으면서 만날 조는 닭이 아무리 못되고 못났다 해도 겨우 2년 살고 헤어지는 마당에, 함께 산 기간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는 소송까지 기어코 갈 막무가내 꼴통은 아니겠지, 하는 희망을 걸어보았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걱정과는 달리 소송까지는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그간 내 어깨를 짓누르던 짐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짐을 느꼈다.
일단은 조정으로 진행하려고 한다는 대표 변호사의 짤막한 브리핑을 들은 백발의 국장님은 내게 소송을 할지 조정을 할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조정 신청서'를 작성해 볼 것을 권유했다. 어차피 내가 조정 이혼을 시도하기로 결정을 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조정 신청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이혼하고 싶은 마음밖에 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생각과 감정과 글은 각기 다르기에 일단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을 '이혼을 해야 하는 이유'라는 주제의 글로써 정리하면 생각이 훨씬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진짜 너무나 이혼이 하고 싶다가도 막상 그 이유를 글로 적고 보니 이혼까지 갈만한 일은 아니었다거나, 혹은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부터 시작하여 그간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글로 정리하면서 ‘아, 이렇게 쭉 써놓고 보니 난 정말 확실히 이혼을 해야겠구나’ 또는 '막상 글로 쓰고 보니 별 것도 아닌 일들이었네' 이런 식으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마음의 결정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래 일단 한 번 써보자. 이 전쟁이 쓸고 간 자리처럼 쑥대밭이 된 마음과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지도 몰라.’
사실 그랬다. 소송이든 조정이든 반드시 이혼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로 변호사 수임료를 지불하고 난 지금까지도 '정말 이혼이 정답일까'라는 머릿속 질문에 대해 확실히 대답할 수가 없다. 이혼을 원하느냐에 대한 대답은 확실히 '그렇다'이지만,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이혼이 정답인지' 묻는 질문에 나는 단 한 번도 확실한 대답을 내놓은 적이 없다. 내가 변호사 수임료를 결제할 때에도, 국장님이 '오늘 당장 결정하지 말고 생각을 좀 더 해보고 결정을 해라'라고 조언할 때도, 아니 맨 처음으로 돌아가 이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올 때에도 줄곧 나는 '이혼만이 정답이다'라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수임료를 결제할 때 망설였던 건, 그것이 꼭 거액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확실하지? 후회 없지?'라는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이렇듯 이혼을 간절히 원하기는 하나 그것이 반드시 정답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아이러니하고 복잡한 상황과 생각과 감정을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다만, 남편(이라 불리는 만날 조는 닭)과 너무나 자주, 심하게 부딪히고, 말이라는 것이 단 한 어절, 한 문장도 통하질 않으니 당장 그의 꼴을 보지 않고 살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크다. 하지만 그와 그저 남으로 갈라서 버릴 수도 없다. 우리는 아이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남편을 평생 안 보고 살고 싶어도(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아이가 어리기에 더욱 자주 만나거나 소통을 하고 지낼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시간적,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남편과 시댁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금 나와 남편, 양가 부모님 네 분 이렇게 총 6명이 아이 하나를 돌아가며 보고 있는 상황에, 그 시간과 노동력이 딱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과연 나는 내 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까? 또 지금까지는 시부모님과 '공동 육아'를 하시는 나의 부모님이 내가 이혼한 후에는 '독박 육아'를 하시게 될 텐데, 그럼 또 얼마나 고된 삶을 사시게 될까? 그 모습을 지켜볼 나의 멘탈은 과연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이혼을 간절히 원하지만 이혼에 대한 확신이 없는 내 마음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 신물이 난다. 이건 모두가 내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 아이와 함께 살 집을 얻고, 또 아이와 살림을 돌봐줄 도우미를 몇 명 쓸 형편이 된다면 나는 결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하고 아이와 둘이 살기 위해서 나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 진행 중인 스타트업 투자를 성사시키고 회사를 일으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아이를 전적으로 돌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나의 부모님이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이제야 손주들 재롱을 보며 노년을 즐기게 된 칠순을 앞둔 나의 부모님에게 날개를 달아드리진 못할 망정 족쇄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기에 나는 경제적으로 한참이나 부족하다.
늘 그렇듯 이런 생각의 끝에는 어김없이 '아, 그냥 나만 참고 살면 되는데'라는 오뇌가 뒤따른다. 왜 나는 남편과의 생활을 참고 견디지를 못하는가. 그 옛날의 불쌍한 여성들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 이렇게 들어도 못 들은 양, 보아도 못 본 양,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양 참고 살았다는데. 나는 자립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왜 조금도, 하루도 참지를 못한단 말인가. 사실상 결혼 후 지금까지 2년 내내 줄기차게 이혼을 소망해 온 건 나 혼자였다. 결혼 초부터 시작된 나의 일관된 이혼 요구에 대해 남편은 처음에는 침묵했고,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나의 이혼 타령에 순순히 동의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남편은 결코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전처럼 이혼을 목놓아 부르는 나에게 더 이상 암묵적인 반대 의미인 무반응으로 일관하지 못하고 이제는 항상
"그래, 그럼 이혼해."
라고 대꾸한다.
어쨌든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 남편은 내가 가만히 있는데도 이혼을 요구할 위인이 못된다. 더 이상 이 결혼 생활을 참을 수가 없다며 거의 매일 날뛰는 나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지 못할 뿐, 나처럼 이혼을 염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 만날 조는 닭의 속을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굳이 유추해 보자면 나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닌 정도라고 느끼는 듯하다.
그래, 제발 국장님 말대로 조정 신청서를 쓰면서 복잡다단한 내 머릿속이 대청소를 마친 드레스룸처럼 말끔하게 정돈되길 바란다. 철 지난 옷은 잘 접어 깊이 넣어두고 지금 꼭 필요한 옷들은 말끔히 손질하여 손에 잘 닿는 곳에 한 방향으로 걸린 말쑥한 모습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다가도 극적으로 화해에 이른 하루 이틀간의 나와 남편은 아직 사랑하는 연인 같아 보이기도 하니까.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을, 아니 지금 당장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마음 따위보다는 무엇이 옳은지, 정답을 나는 꼭 알고 싶다.
과연 조정 신청서를 다 쓰고 난 후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할까?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나는 노트북을 열고 조정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