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02.
'아,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지.'
내가 아무리 이혼에 미친 사이코이더라도 굳이 결혼기념일에 맞추어 변호사 상담 일정을 잡았을 리가 없다. 그저 최근 몇 달 동안 나와 남편은 서로가 서로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채 이혼만을 염원하며(적어도 나는) 지내고 있으니 결혼을 기념한다느니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느니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기념일에 이혼 변호사 사무실을 찾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나와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지 순수한 호기심이 따라 일었다. 몇 초 안 되는 다음 순간에는 '너 이 녀석, 한 번 사는 인생 참 재미있게 사는구나!'라는 감탄을 빙자한 조소가 잇따랐다. 사람은 하루에 약 오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는데, 나는 결혼기념일 일정 알림을 본 그 찰나의 순간에 오만 가지가 넘는 생각을 한 번에 한 것 같다.
오만 가지 생각이 집채만 한 감정의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는 중 미리 상담을 예약해 둔 로펌에 다다랐다. 엄청나게 공고한 결속력과 역사와 전통을 가진 비공개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의 오랜 멤버인 나의 절친이자 현재의 예비 공동 창업자가 커뮤니티 내 집단지성을 통해 추려낸, 규모는 작지만 대표 변호사의 잦은 매체 출연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었다. '이혼 전문 로펌’이라는 문구가 회사 이름보다 더 크게 적혀있는 사무실 문을 열며 ‘드나들기 부끄럽긴 해도 그래도 이혼만 전문으로 한다는데, 뭐 조금 더 잘하긴 하겠지’라는 믿음이 솟아난다기보다는 '그 많고 많은 분야 중에 이혼만 담당하다니, 여기 변호사들은 일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참 못할 짓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하... 내 코가 석자인데 이 와중에 누가 누구 재미를 걱정하니...' 하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터졌다. 참말이지 어떠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물러섬이 없는 나의 태평양 같은 오지랖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마 내가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남 걱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직원의 안내를 받고 입성한 대표 변호사실에는 해당 로펌 홍보 자료에서 보았던 여성 대표 변호사가 마치 방금 TV 출연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것처럼 완벽한 화장과 헤어 스타일링을 하고 내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물론 내가 좋은 일로 로펌을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그런 사람이 있긴 할까마는),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심지어 고객-에게 웃으며 인사할 여유 정도는 있을 법한데도 그 대표 변호사는 나에 대한 배려에서 인지, 본인의 탁월한 직업정신 탓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되풀이할 것임에 분명한 이혼 상담 매뉴얼대로 질문을 이어갔고, 나는 지나치게 사적임과 동시에 어느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로서 답변을 갈음했다. 이 문답의 과정에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수치스러움을 억누르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혼을 위해 이곳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오며 '가상의 치욕적인 순간'을 머릿속으로 수차례 시뮬레이션 했지만, 실제 상황이 되니 그 타격이 말할 수 없이 컸다. 그 모멸의 순간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내가 멋모르던 20대 초 대학생이던 시절의 한 날, 심한 생리통으로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진료를 하던 무표정의 여의사가 대뜸 간호사 두 명 앞에서 “성관계 경험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이 떠올랐다. 정확하다. 그때 그 여의사가 장착했었던, 환자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무심한 표정과 기계적인 말투가 십여 년 만에 이 대표 변호사를 통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지금의 나는 20대의 여리고 순진한 여대생이 아니다. 싱글맘으로 아이를 키우며 사업을 성공시키고자 기어코 이혼 소송을 불사하는 억척스러운 아줌마다. 그 억척스러운 아줌마는 이왕 이토록 욕보인 바, 이길 수 있는 방법이나 실컷 물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양육권은 어떻게 해야 100% 보장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재산 분할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지 핵심적인 질문이 아주 잘 준비되어 있으니.
“현재 남편분과 같은 집에서 생활 중이신가요?”
“네, 아직은요.”
나는 예상치도 못한 조언에 허를 찔린 듯 당황했다.
“... 꼭... 꼭... 그래야만 할까요?”
이때까지 덤덤한 척을 넘어 도도한 척 대표 변호사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노트에 미리 준비해 온 핵심 키워드를 바탕으로 필수 질문을 숙련된 인터뷰어의 느낌으로 해대던 나는 '꼭' 팔푼이마냥 물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표정하기만 했던 대표 변호사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만약 남편분께서 저희한테 오셨다면 저희는 진짜 소송을 하실 마음이 있으면 오늘 당장 짐 싸서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들어가라고 조언을 드릴 겁니다. 이 상담을 마치는 길로 바로요.”
대표 변호사는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눈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마치 입력된 문장을 읽는 TTS(Text to Speech) 프로그램처럼 했다.
순간 머리로 피가 돌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간 시야가 흐릿해졌던 것도 사실이다.
머리를 한 대 더 얻어맞은 팔푼이가 또 이름에 걸맞은 질문을 했다.
“왜요? 남편은 양육권은 저한테 줄 거예요. 그리고, 아니, 그러니까... 애를 막 데려가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왜 안됩니까? 아직 두 분 모두에게 친권과 양육권이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육권을 주장하건 주장하지 않건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게 유리합니다. 만약 양육권을 원한다면, 소송 시점에 아이를 누가 데리고 있는지가 양육권 결정에 중요하게 작용을 하기 때문이고, 양육권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상대방이 애가 타서 ‘재산 분할 같은 건 다 필요 없으니 아이만 달라’고 할 수 있어 여러모로 유리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죄의식도 수치심도 없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런 엄청난 말을 하다니, 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두 대 더 얻어맞은 팔푼이가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럼 소송을 시작하게 되면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내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답변이 시작됐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시는 게 좋습니다. 소송하는 사이에 한 집에서 부딪혀봐야 좋을 것도 없고요. 그리고 일단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오시면,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에게 아이를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나 시댁 식구가 아이 얼굴만 잠깐 볼 것이고 절대 데려가지 않는다고 각서를 써와도 절대 보여주시면 안 돼요. 상대방이 그 자리에서 아이를 데리고 도망가버리면 그때는 본인이 아이를 못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천성적으로 겁이 없다. 지금 살면서 별로 두려울 것 없이 살았고, 실제 나는 무서운 것도 무서운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런 내가 변호사의 그 말을 들으니 덜컥 겁이 났다.
오늘까지 꼭 2년을 채운 결혼생활 내내,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1년이 넘도록 나는 이혼을 원하고 갈망하고 수도 없이 머릿속으로 그려왔다. 하지만 아이를 못 보고 살아가는 삶은 단 한순간도, 그게 현실이 되는 0.1% 가능성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순간적으로 나는 아이를 재택근무하는 남편에게 맡기고 나와 변호사와 상담을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남편이 아이를 데려가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아이 없이 사는 날을 그냥 몇 초 상상만 했을 뿐인데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상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킬 뻔했다.
‘안돼, 정신 차리자. 이 상담 이후로 중요한 미팅이 있고, 그걸 끝낼 때까지는 집에 갈 수 없어.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그 인간이 아무리 속좁고 치사하고 못났을 망정 양육권이나 얼마 없는 재산 덜 주겠다고 돌쟁이 애를 엄마한테서 감히 떼어 놓을 생각까지 할 무뢰한은 아니야. 게다가 오늘은 시부모님이 오셔서 애를 봐주시기로 했잖아? 남편이 시댁으로 애를 빼 돌릴 생각이었으면 애초에 시부모님께 애 봐달라 부탁을 하지도 않았겠지. 응, 적어도 오늘은 아니야. 진정해. 진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차분히 생각해 보자.’
이렇게 나 혼자 잠시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대표 변호사는
‘이제 할 말 다 해줬는데 그만하고 나가줬으면 좋겠군.’
하는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문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듣자 하니 분할할 재산도 얼마 없으니 성공보수도 얼마 못 받게 생겼고, 그나마도 여러모로 나에게 안 좋은 상황으로 그 미미한 재산의 반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니 내가 계약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임료는 똑같은데 이혼 성립 당시 분할하는 재산 액수에 비례해 성공보수를 받으니 웬만큼 골치 아픈 케이스가 아니라면 대충 비슷한 노력을 들여 소송 또는 조정을 대행할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분할 재산이 많을수록 비싼 고객이 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떤 고객에게는 500만 원을, 어떤 고객에게는 5천만 원을 성공보수로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분할할 재산도, 혼인 기간 2년으로 재산 형성 기여도도 턱없이 적었던 나는 그리 달가운 고객이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적은 확률이겠지만 양육권을 뺏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한 급작스러운 패닉 상태에서 가까스로 헤어 나와 머릿속으로 준비한 추가 질문을 떠올리려 애쓰는 나를 앞에 두고 대표 변호사는 나와의 상담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지만 차마 직접 말할 수는 없으니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잠깐의 공황 상태로 그럴듯한 질문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을뿐더러, 한없이 초라한 재산 분할 액수의 크기만큼 작아져버린 나는 결국
“감사합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녀의 난처함을 빠르게 해결해 주었다.
그 10분 남짓한 시간에 10만 원을 지불한 상담을 통해 나는, 적어도 나에게는 결코 변호사 없는 이혼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노련한 대표 변호사는 나에게 어쩌면 아이를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 외에도 추가로 몇 가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냉소적인 표정으로) "들어보니 2년 동안 남편분은 시댁으로 재산을 빼돌렸고, 본인은 친정 돈을 가져와 재산 분할 대상에 포함시키셨네요."
(세상에 태어나 들은 말 중에 가장 어이없는 얘기라는 표정으로) “진짜 남편의 그 말을 믿으셨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냥 남편과 시댁은 그때부터 이혼을 대비한 거죠.”
‘뭐라고? 이 아줌마 지금 내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쭉 남편과 시댁에게 속고 살았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뒤통수를 실제로 몇 대쯤 얻어맞은 듯이 얼마간 정신을 못 차리던 내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변호사님, 저희 시아버님이 과거에 고위 공직자이셨고, 그로 인해 무슨 무슨 일을 겪은 바 있으셔 정말 대비 차원에서 그러셨다고 생각하는데, 변호사님께서 보시기에는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라고 애원하듯 묻는 나에게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표정으로) “네, 전혀 없어 보입니다.”
라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말했다. 그 '네, '라는 말이 어찌나 빠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는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무척이나 얄밉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 로펌에 상담 예약을 하면서 소송 진행이나 변호사 고용 따위를 전혀 계획하지 않았다. 나의 전략은, 노련한 이혼 전문 변호사와의 깊이 있는 상담을 통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서 그 정보 우위를 바탕으로 무식하게 이혼 소송만을 부르짖는 남편에게 협의 이혼으로 진행할 것을 설득 또는 회유, 필요하다면 겁박까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10분 남짓의 영업이혼 상담을 통해 지금껏 내가 이토록 순진무구하게 협의 이혼만을 부르짖으면서 이런 무시무시한 진흙탕 싸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2년 간 거의 매일 부르짖던 협의 이혼을 10분 만에 나의 이혼 옵션에서 지워버렸다. 내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아이를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고, 이는 어떻게 하면 1회의 상담에서 끝나지 않고 변호사를 고용하는 이혼을 선택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 앞에 앉은 이 위대한 세일즈 우먼변호사가 심어준 것이었다.
비로소 나에게서 벗어난 대표 변호사는 로펌의 '국장님'이라는 직함을 가진 백발이 성성하고 연세가 지긋하신 분께 나를 빠르게 넘긴 후 빠르게 사라졌다. 그 국장님은 나의 아빠와 동년배 정도로 보였고, 그 연세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 이혼 분야 일을 해오셨음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분이 로펌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단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노련함이나 상담 스킬 때문만은 아니다. 그분은 해당 로펌의 대표 변호사에게 철저히 결여된 인간미과 따뜻함과 편안함을 두루 갖추고 계셨다. 매체 출연 경력을 내세우며 잘 차려입고 연예인처럼 단장한 채 고객에게 기계적 성의를 보이는 대표 변호사와의 상담을 마치고 ‘에이, 다른 데 가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머리 희끗한 아빠뻘 국장님이 등판하여 이혼의 A부터 Z까지를 찬찬히 그리고 노련하면서도 따뜻하게 이혼과 그 절차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내가 상담료를 결제하고 로펌 문을 나설 때 엘리베이터 앞까지 따라 나와 한 번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 봐라, 그리고 이혼을 결정할 때 주변사람들, 그러니까 부모님이고 아이고 전혀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본인이 어떻게 해야 더 행복할지, 딱 그것만 생각하라고 신신당부하며 마치 친정 아빠처럼 나를 다독여 주었다. 그때 비로소 고객은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된다.
‘저 여우여자는 모르겠고, 국장님이라면 믿어볼 만 해.’
그렇게 나와 그 로펌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니, 그렇게 나는 제대로 영업당했다.
'상담 후 구매 전환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구역의 이혼 전문 변호사들은 상당한 세일즈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