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눈치 밥
식판에 먹는 밥은 희한하게 먹고 나면 금방 배가 고프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서 조금 덜 고픈데, 20대 때는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오후 3시쯤이면 떡볶이나 라면 등 간식을 먹으러 달려가곤 했다.
분명 12시, 1시 정도에 밥을 먹었는데, 오후 3시에 간단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떡볶이 집에 가보면 회사 사람들이 몰려 있다.
따로 약속 잡을 필요 없이 그 시간에 거기 가면 얼굴 볼 수 있고,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근황 토크와 회사 돌아가는 정보를 들을 수 있다. 요즘 같은 겨울엔 더 따끈한 오뎅 국물과 함께.
식판에 먹는 밥은 개별 반찬과 메인 요리가 나오는 고급 식당이나 집밥과는 다르다. 보통 직원 구내식당이나 학생식당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배식을 받거나 각자 담아서 먹고, 설거지 등 정리도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회전율도 빨라야 수백, 수천 명 그 이상의 사람들이 밥을 정해진 시간 안에 먹을 수 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군대 가서 신병 교육을 받을 때였던 것 같다. 나이도 20대 초 한창 많이 먹을 때, 아침부터 일어나서 훈련받으면서 몸 쓰고, 배고픈데 조교들이 옆에서 빨리 먹으라고 아우성이다.
보통 5분 만에 먹는다. 그렇게 빨리 먹으려면 가뜩이나 많이 담을 수 없는, 한정적인 식판에 적게 담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적게 먹다 보니, 적응되고 짬밥이 올라가면 자연스레 오후에 PX (군대 매점)에 가서 냉동식품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고, 컵라면 등 군것질을 하게 된다. PX 장사하려고 머리 쓴 건가? 글을 쓰면서 옛날 생각해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도 든다.
즉, 한정된 그릇에, 빨리 먹어야 하니 적게 먹게 되고 그러니 배가 빨리 꺼지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직장에서 팀 단위로 밥 먹는 문화가 자리 잡혀 있다. 요즘은 점심시간을 개인 시간으로 보내고, 혼자 편하게 먹는 일도 많다. 하지만, 기본은 아무래도 같이, 근처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밥을 함께 먹게 된다.
같이 천천히 먹으며 편하게 담소하면 좋지만, 그 평범한 것이 어디 쉬운가.
다양한 사람이 서로 맞춰야 하고, (회식 장소 잡으려는데 본인 회 못 먹는다는 사람 꼭 있다 ㅎ)
수직적인 관계에서 월급 받고 평가 받는 가운데 먹는 눈칫밥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먹다 체하겠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고, 차라리 내 돈 주고 맘 편하게 먹고 오겠다는 외침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아무 말 없이, 혹은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먹느라 불편하기도 하다. 한술 더 떠서 소식하며 5분도 안되어 식사를 마치고,
“천천히 먹어.”
하며, 휴대폰을 자꾸 들여다보는 상사가 있으면,
체한다. 심할 경우 나중에 토하기도 한다.
구내식당 줄이 길 때는 20분, 30분 줄을 서서 기다렸다 (정말 이 얘기 저 얘기 다해도 몇 바퀴 돈 줄이 끝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역시 자연스럽게 각자 핸폰질) 밥 타서 앉자마자 바로 허겁지겁 다 먹어야 하니 속이 좋을리가 없다.
남중, 남고, 군대 등에서 잔뼈가 굵은 나조차, 다들 일어나니 반도 못 먹고 같이 일어서는 경우가 있는데, 천천히 식사하시는 여직원 분들은 얼마나 힘드시겠나.
점심시간에 밥을 빨리 먹고 잠을 자거나, 산책을 하거나, 독서 등을 하기 위해서도 이렇게 빨리 먹는데,
(어떨 땐 그냥 빨리 먹기 전쟁 ㅎㅎ)
이렇게 식사 속도에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직원들이 생기면,
“천천히 먹을 테니, 먼저 가세요.”
한다.
보통, “그럴까. 그럼 천천히 먹어.”
하고 가면 다행인데,
어떤 분들은 굳이 “괜찮아. 천천히 먹어. 기다릴게. “
하면서 밥 먹는 사람들을 안 괜찮게 한다.
같이 하고 움직이는 것이 익숙한, 고인 물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뭘 그렇게 모여서 하는 걸 좋아하는지. 이런 분들이 꼭 가을 되면 체육대회 하자, 1박 2일로 팀 워크숍 가자고 난리다. 요즘 90년대생, 2000년 대생들이 얼마나 그런 걸 좋아하겠나.
자기들끼리 가면 좋겠지, 재밌고. 근데 아저씨들하고 밤새 술 마시는 게 재미있겠나. 할말 많지만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겠다.
그저 같이 땀 흘리고 몸 부대끼며 친해진다는 쌍팔년도 마인드는 제발 좀 넣어뒀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88 올림픽이 끝난 지, 30년이 넘게 지났다. 같은 21세기라는 2002 월드컵이 끝난 지도 20년이 넘었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족구는 족구 좋아하는 아저씨들끼리만 차는 걸로)
그런데, 이 분들이 이런 습관이 있는 이유가 있다.
예전에는 밥 빨리 먹고, 점심시간에 이 빨리 닦고, 바로 일하는 성실한 직원을 제일로 치던 시기가 있었다.
이른바 산업화 고도 성장 시대였다.
공장에서 효율적으로 잘 찍어내고, 기술이나 노동 집약적인 산업 시대에는 이런 자세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제일 먼저 나와서, 제일 늦게, 끝까지 일하고 가는 성실성.
하지만, 이제 시대는 자동차 공장 하나 없는 우버가, 자동차 공장을 국내외에서 보유하고 있는 현대차보다 시가총액이 높은 시대이다. 즉, 자동차를 JIT 방식으로 (just in time에 불량률을 최소화해서 생산) 생산하는 일본 도요타 방식은 기본일 뿐이고,
상상력과 창의성 그리고 변화가 주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걸 아니까 현대차가 생산량 증가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 mobility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보다 산업화와 세계화가 빠르고, 우리가 변화의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에 아픔의 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산업을 일으킬 때도 일본의 도움을 받았고, 일본에게서 많이 배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미국에 이어, 전 세계 2위 경제 강국이었던 일본도 지금 우리보다 뒤처진 부분도 많고, 평균 임금마저 우리가 앞서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IT, 반도체 강국 대한민국이 빛나는 부분도 있다.
(요즘 어려움이 있지만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몇 년 전 경영 서적으로 각광을 받았던 일본전산 이야기라는 책에서는,
밥 빨리 먹는 직원을 뽑고 중용하라고 했다.
그런 성실성도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옛날 분들 중에 그 말에 공감하고 감명 받은 분 생각보다 많다.
(그렇게 혼자 감동의 눈물 흘리시는 것까진 좋은데, 밥 천천히 먹고 싶은 다른 사람들 빨리 먹으라고 강요해서 눈물 젖은 밥 먹게 하진 맙시다요. 제발)
하지만, 이제는 시대도 변했고, 개인 취향이나 사는 방식도 바뀌었다. 건강을 위해서 밥은 꼭꼭 씹으며 편하게 20분 이상 먹으라는 말도 있던데.
안 그래도 돈 받고 일한다고 눈칫밥 신세인데, 하루 중 그나마 편할 수 있는 점심 식사는 여유있게 건강한 식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요즘 다시 회식이 많아져서 다시 소맥 말아돌리느라 아침에 속 안 좋은데, 점심시간이라도 편하게 보내서 이 땅의 직장인들의 만성 위장병도 사라졌으면 한다.
밥 좀 편하게, 천천히 좀 먹읍시다, 제발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