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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이리엔 Jun 13. 2024

650년 된 성벽 앞에 일군 깻잎 텃밭

베란다 텃밭과의 사랑과 전쟁

올해 1월 즈음, 프랑스에 오기 전부터 야심 차게 준비했던 일이 있다. 그건 바로 다이소에서 채소 씨앗사기, 프랑스에서는 정말 구하기 힘들다는 '깻잎'을 기르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깻잎은 한번 맛들리기 시작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쌈채소가 아닌가!?


프랑스는 정말 다른가보다. 아시안마켓에 가도 깻잎을 찾기가 힘들고, 굉장히 고가를 자랑하는 향신료쯤 되는 채소로 분류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 아시안마켓은 철저히 일본/베트남/중국/태국 베이스로 돌아가는 시장이다. 그러니 깻잎이 주류가 아닐 수밖에.



깻잎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는 프랑스에 도착해서 날씨가 따듯해지면 바로 깻잎을 심겠다고 작심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부진 의지로 깻잎 기르기를 고대하던 나는 결국 650여 년 된 아비뇽 성벽을 마주 보고 있는 베란다에서 깻잎과 사랑과 전쟁을 찍고 있다.





전쟁의 서막


5월 초, 햇볕이 따듯해지던 어느 날 깻잎/루꼴라/대파의 씨앗발아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 강낭콩 발아를 해봤던 경험을 살려 키친타월과 솜을 촉촉이 적셔 씨앗들을 불려줬다. 인터넷으로 조금 찾아본 바로는 다이소에서 산 씨앗은 발아율이 굉장히 낮다고 하여 100 립 정도는 되어 보이는 씨앗을 모두 털어 넣고 발아를 시도했다.



1시간이 멀다 하고 들여다보고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인 걸까. 씨앗이 너무 많이 발아되어 버렸다.

비싼 프랑스 공산품 물가에 아직 화분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말이다.


부랴부랴 5kg짜리 작은 흙을 사 와서 집에 있던 온갖 플라스틱들을 끌어모았다. 왠지 조금 많이 어설픈 베란다 텃밭의 시작이다. 나는 사랑과 정성은 가득 하나, 지식과 준비는 부족한 농부였다.



엄청난 기세에 궁지에 몰린 초보 농부


응급처치 수준으로 다듬어 놓은 텃밭을 놔두고, 우리 세 가족은 3박 4일 여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날까지 저 새싹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 줄지 끊임없이 생각했다.


4일째 되는 날, 집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이 나에게 소리쳤다.

"여기 풀 밭이야!"

씨앗들의 생명력은 실로 대단했다. 며칠 물도 못 줬는데, 남프랑스의 강한 햇볕에서 말라죽지도 않고 오히려 엄청나게 자라 있었다. 얼마 안 되는 흙에서 살아보겠다는 떡잎들이 빼곡히 자라났다. 새싹의 엄청난 생명력으로 뿜어내는 기세에 감동받는 것을 넘어서 약간의 무서움까지 느껴졌다.

떡잎들은 무언의 압박으로 나에게 빨리 제대로 된 보금자리를 만들어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듯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남편을 독촉해 25kg짜리 흙과 넓은 화분하나를 들여오기로 했다.


이때부터 나의 하루 첫 일과는 베란다 텃밭 확인하기로 바뀌었다. 깻잎들에게 나의 하루의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깻잎, 그대는 너무 빨라요


딱히 성장욕구를 채울 수 있는 일이 없는 요즘 나의 일상, 이 새싹들에서 성장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드디어 깻잎 모양으로 자라나는 본잎을 보며 매일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얼마나 컸나 들여다보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관심을 주다 못해 하루에도 몇 번씩 무릎이 아파질 때까지 텃밭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으니, 이미 이들과의 전쟁에서는 지고 들어가는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빼곡한 새싹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들이 생겨났다. 갑자기 높게 솓아오른다던지, 큰 이파리를 뽐낸다던지. 더 이상 이렇게 빼곡하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관심을 먹고 자라는 건가, 빨라도 너무 빠르게 자라났다!


아직은 알리에서 주문한 화분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나는 쉼 없이 집에서 나온 페트병들을 잘라 배수구를 만들고 화분들을 여러 개 만들어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래도 나름 처음으로 가져본 베란다에서 텃밭을 만드는 것인데, 페트병으로 마구마구 채우기는 정말 싫었다. 하지만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빠른 새싹들의 공세에 또 지고 말았다.





전쟁의 주도권을 쥐다


퇴근 후 돌아온 남편을 베란다로 끌고 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중요한 나의 일과이다. 특히, 빠르게 자라고 있는 '우수 깻잎'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브리핑이다. 성장속도가 느려진 루꼴라와 시장에 파는 대파처럼 커질 수 없다는 다이소 대파는 나의 주요 관심거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매일 조금씩 늘어나는 페트병 화분을 보며, 주문한 화분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냐며 게으른 농부에게 넌지시 눈치를 준다. 뭐, 나도 인정한다, 준비되지 않은 홈파머인데 어쩌겠어!


그러다 텃밭의 화분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디 한다.

"왠지 텃밭이 우리 인생 같아"


띠용... 무슨 소리래 이게?


"좀 잘 자라는 깻잎들은 선택받아서 1인실 페트병 화분으로 옮겨졌고, 아직 선택받지 못한 깻잎들은 계속 작은 화분에서 빽빽하게 살고 있잖아"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


아, 맞는 말이었다.


빼곡한 새싹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건장한 깻잎'들만 나에게 간택되어 매일 조금씩 만들어내는 페트병 화분으로 '이주'되었기 때문이다. 순간 아차 싶은 마음과 남은 깻잎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동시에 매일 깻잎들에게 끌려다니는 '지는 전쟁' 중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이들을 '선택'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무조건 나의 승리이다, 내가 선택해주지 않으면 적은 흙에서 영양분을 더 이상 흡수하지 못하고 서서히 말라갈 테니.





생일 기념, 공평하게 베푼 사랑


남편과의 대화 이후로 빼곡한 깻잎들이 더욱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장이 느리다는 이유로 관심밖에 뒀던 루꼴라도 눈에 밟혔다.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는데, 빨리 좋은 자리를 잡아주고 싶었다.


알리에서 주문한 부직포 화분이 도착했음에도 귀찮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분갈이를 드디어 결심했다. 처음으로 이렇게나 조용하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맞이하는 나의 생일, 왠지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또 저 새싹들을 내 성장욕구에 이용했다.


장장 3시간에 걸쳐 진행된 분갈이. 빼곡했던 새싹들은 생각보다 서로 뿌리가 많이 엉켜 있었고, 어떻게든 햇볕을 받아보려 위로 높게 자라 있었다. 깻잎 수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화분 크기와 흙에 어쩔 수 없이 약해 보이는 모종들 10여 개를 포기하고 버렸다.



이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이 텃밭 상태로 첫 번째 깻잎 수확까지는 유지를 해보려고 한다. 관심 밖이었던 루꼴라와 대파도 새로운 화분과 흙에 자리를 잡으니 빠르게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고 있다. 역시 내가 포기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깻잎의 기세에 눌려 약한 이들을 무시했던 게 문제였다.  


생일을 기념해서 모두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줬더니 괜스레 행복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깻잎에게 의지하는 농부


자리를 잡아주고 난 뒤, 뿌리가 다시 흙에 자리 잡는 기간 동안 성장이 더디게 느껴졌다. 그래도 분갈이로 하루이틀 힘없이 쳐져있던 깻잎들이 힘 있게 곧아지는 걸 보니 성공적인 듯했다.


미리 1인실을 차지했던 우수깻잎들은 그 사이에 폭풍성장의 단계를 거쳐, 첫 번째 본잎의 순 치기까지 견뎌냈다. 내 눈이 이상한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깻잎 이파리가 커지고 있는 게 보인다.

이들은 그냥 햇빛, 흙, 물을 통해 영양분을 흡수하고, 발아되었으니 성장하고 있는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뿜어내고 있다. 사랑과 전쟁의 마음으로 매일매일 들여다봤더니, 말은 못 하지만 굉장히 깊은 내적 친밀감도 생겼다.


베란다에서 텃밭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같이 눈에 들어오는 성벽이 굉장히 이질감이 든다. 몇백 년 전에 교황이 세운 성벽 앞에서, 깻잎을 기르고 있는 게 현실인 건가 싶은 느낌.


그게 어디인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환경에서 잘 자라는 텃밭의 채소들을 보니, 나도 여기에서 빨리 뿌리를 내리고 내 역할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벽과 깻잎,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자꾸 나에게 새로운 의지를 생기게 해 준다. 대단히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잘 크는거라고.



물론, 결국엔 내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란 걸 안다. 무럭무럭 자란 이들을 맛있게 먹어치울 그때의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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