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마무리된 식사와 한국 술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 이야기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프랑스인들 답게, 식사를 마쳤다고 집에 먼저 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와인잔 들고 일어서서 진짜 유러피안 스타일로 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은 이때다 싶어, 한국의 술게임들을 소개해주겠다 말했다. 다들 신나서 착석하고, 술게임 벌주를 위한 소맥을 따랐다.
- 소주잔이 맥주잔 속으로 가라앉으면 벌주를 마시는 타이타닉
- 소주뚜껑을 돌돌말고 쳐서 떨어뜨리는 사람의 양 옆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게임
- 한국인이면 어린이까지 모를 수 없는 369게임
- 대학생이 되어 술게임 입문 시 꼭 거치는 딸기게임
우리는 이런 게임들을 준비했다고 설명하고, 프랑스 친구들은 특히나 '타이타닉'이라는 게임이름이 어떻게 지어진거냐며 궁금증을 가졌다. 뭐 큰 설명도 필요없이 바로 해볼 수 있는 게임이니, 술잔이 가라앉는 것을 타이타닉 배라고 생각하고 만든 게임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게임을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떠있는 소주잔에 소주를 조금씩 부어넣기 시작하자 모두의 얼굴에서 개구장이 같은 표정이 조금씩 떠올랐다. 두게임 정도 지나자 잘하는 사람들이 확연히 갈리기 시작했다.
병을 톡톡 쳐서 한두방울의 소주만 떨어뜨리는 고급스킬을 쓰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스킬을 쓰는 친구가 나와 남편 바로 앞 순서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슬아슬한 잔을 몇번이고 침몰시겼다.
하지만 술게임을 10년동안 갈고닦은 실력은 어디 안 갔다. 나도 곧 고급스킬들을 기억해냈고, 이 게임을 가장 좋아하던 최고령자 친구가 연거푸 벌주를 마시게 되었다.
그렇다. 한국 술게임의 진정한 함정은 벌주를 마신 사람은 갈수록 더 마시게 된다는 것이다. 소주를 떨어뜨리는 힘조절이 힘들어지고, 딸기 게임의 박자를 까먹고, 369게임에선 박수치는 것을 까먹는다.
그렇게 그 친구는 369게임을 하며 숫자를 말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게임을 즐겼다. 부인이 집에 가자는 말을 5번 이상 했음에도 그냥 여기서 놀다가 자고 아침에 가면 안되냐고 하며 ㅎㅎㅎ
게임이 대충 마무리되고, 프랑스 친구들은 '타이타닉'게임을 극찬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살면서 해본 게임 중에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라며... 맥주대신 레드불을 넣고, 소주잔에 럼을 넣으면 프랑스식이 된다고 신나게 상상했다. 심지어, 사이다와 콜라로 하면 학생들도 할 수 있는 게임이니 얼마나 천재적인 게임이냐며 극찬을 했다. 우리도 몰랐던 타이타닉 술게임의 재발견이었다...
다국적 모임에선 문화교류가 필수적이기에, 친구들은 프랑스 술게임도 소개시켜줬다. 가장 간단한 게임으로 작은 종이박스를 위로 던져, 얇은 면으로 상자를 세우는 게임이었다. 전 사람이 성공했다면, 나는 2번 연속 성공, 내 다음사람은 3번 연속 성공해야한다. 그리고, 던지는 순간부터 두바퀴를 돌면 그냥 위너로 양 옆 사람들이 벌주를 마셔야했다.
술도 좀 취했고 게임을 하다가 너무 웃긴 상황에 나도 모르게 계속 웃게되었는데...
작은 종이상자가 딱히 없었던 우리는 한국에서 챙겨온 상비약 박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하필 약이 '속 쓰리고 위 아플 때' 먹는 위장약이었던 것이다. 속쓰림은 전형적인 술병 아니던가...
"아픈 속엔 아프소겐".....
평균나이 35살 어른들이 새벽 3시까지 '위장약'박스로 술게임을 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재미있게 노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지만, 한국에선 대학생들이나 하는 술게임을 하며 웃고 떠들고, 타이타닉 같은 원초적인 게임에 눈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새삼 어색하게 느껴졌던 듯 하다.
나중에 들어보니 타이타닉에 빠져 엄청난 벌주를 마셔댄 친구는 20년만에 숙취로 고생했다고... 남편은 차마 막걸리, 소주, 소맥 이 술들이 숙취가 꽤 심한 술이라고 말할 수 없어, 와인과 맥주를 섞어마셔 그런 것 아니냐며 얼버무렸다고 한다.
마냥 좋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술문화를 알려주고 같이 즐길 수 있어 참 좋았다. 안주/음식에 따라 술을 고르는 문화, 건배 예절과 건배사, 4명 이상의 단체모임에서 다같이 즐길 수 있는 술게임, 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기 위한 폭탄주. 사실 과하게 마셔서 그렇지 한국의 술문화는 굉장히 디테일하고 매력적이다.
다음엔 또 다른 게임을 가져가서 그들을 놀라게 해줘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P.S. 이 글을 빌어 모든 소주브랜드가 재미있는 술게임을 같이 홍보하여 해외진출에 성공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