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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더드림 Sep 09. 2021

이봐, 운동은 심장이 아니라 신장이야

<꿈, 좀 바뀌면 어때>

 나의 단골 출석 번호 “1번”. 


 공부를 가장 잘해서도 가장 귀여워서도 아니었다. 그냥 키가 제일 작으니까 받은 번호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성장이 느렸다. 아버지 170cm, 어머니 153cm. 부모님 두 분 다 결코 그 시대에 큰 키는 아니셨지만, 그래도 결코 엄청나게 작은 키는 아니셨다. 그러나, 큰 키 유전자는 아침 7시 정신없는 지하철에서 냉소적인 표정으로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바쁜 현대인들처럼 나를 스쳐 빠른 속도로 지나쳐간 것 같다. 사실 아예 닿지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성악을 하셨던 할머니와 축구 선수 생활을 하신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예체능 실력 하나는 타고난 '나'였다. 중학교 시절, 매 시험마다 과목별 1등에게 상을 주는 시상식이 있었는데 전교 1등이 날 이기지 못했던 유일한 과목이 바로 음악, 미술, 체육이었다. 그 분야에서만큼은 내가 전교 1위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작은 키 콤플렉스 극복 프로젝트였을까 아니면, 모든 아버지의 로망인 ‘아들과 함께 운동하기’ 때문이었을까.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본인이 하던 운동을 모두 배우게 하셨다. 그렇게 유치원 때부터 축구, 농구, 테니스, 볼링, 탁구 등 해보지 않은 구기 운동이 없을 정도였다. 주위에서는 아들 운동선수 시킬 거냐는 질문도 많이 받으셨다고 한다. 그도 그러할 것이 보통 부모님들은 자식이 학교를 마치면 단과학원이나 종합학원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나는 학교를 마치면 축구부, 끝나면 농구, 저녁 먹기 전 테니스, 저녁 검도 학원에 갔기 때문이다.

     

 그중에 가장 두각을 드러낸 운동은 바로 테니스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키가 작긴 했지만 성장할 가능성을 염두로 두고 운동을 했었고 다른 학생보다 운동량이 월등하게 많아 근육량도 많았다. 나는 동네 유명인사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집 바로 앞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주말만 되면 같이 테니스를 배우던 분들이 테니스 옷을 쫙 빼입고 소위 넘치는 포스를 자랑하며 테니스를 치러 오시고는 했다. 주말 오후만 되면 테니스장에서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무슨 일 인가 하고 아파트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면 아주머니들이 큰 소리로     


 “형주야~, 테니스 한 게임 하자~, 짜장면 사줄게!! 아버지 데리고 내려와~!!” 라고 할 정도였다.

      

 짜장면이라는 유혹을 넘기지 못하고, 금세 입고 있던 잠옷을 홀랑 벗고 얼른 옷을 입어 준비해서 내려가면, 테니스장 회원들은 마치 도장 깨기를 준비하는 선수들처럼 아버지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팀 이름 <아빠와 아들>로 이에 차례로 도전을 받아드렸다. 하하, 그러나 쉽게 승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우리 <아빠와 아들>팀은 승률도 꽤 높았다. 그래서 동네 중국집 짜장 맛을 구별할 정도로 공짜 짜장면을 많이도 먹었다. 그렇게 어느덧 내 첫 번째 꿈은 테니스 선수가 되어있었다. 


 문제는 중학교 때부터였다.

 성장이 멈췄다. 주위 친구들은 한 달은 커녕 하루에도 몇 cm 자랐다고 자랑을 하는데 도무지 내 키의 숫자는 바뀔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운동은 포기할 수 없어서 바보같이 매일 팔굽혀 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했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에 하나다. 그것만 안 했어도 5cm는 더 자랐지 않을까). 그러다 보니 예전에는 상대가 안 되던 친구들이 점점 성장하기 시작하고, 나와의 격차는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테니스라는 게임은 중간에 네트가 있다. 네트의 높이는 정해진 규격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다. 네트를 무력화시키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높이’였다. 단편적으로 생각을 했을 때도 공을 위에서 밑으로 치는 것과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것 중에 전자가 더 중력의 가속도를 받아 속도가 빨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장이 늦어지다 보니 서브의 속도도 스트록(*테니스 기술)의 속도도 점점 발전이 없었다. 괜찮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키 150cm의 서브와 180cm의 서브는 30cm 높이 이상으로 파워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놈의 승부욕.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급해져 왔다. 매일 주말에 공 200개 넘게 들고 나가 몇 시간씩 서브 연습을 했다. 평일에도 학교를 마치고 보충 훈련을 했다. 그러던 와중 테니스 선생님이 바뀌게 되었고 좀 더 세련된 기술을 배우게 되면서 실력이 점차 늘어나는 듯했다. 운명의 장난인건지 그 당시 아버지가 중국과 한국을 넘나들면서 사업을 하고 계셨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아버지 얘기로는 당시 아버지 친구와 역대 테니스 레전드 선수였던 이형택 선수와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시아인은 한계가 있어요. 테니스의 길이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이형택 선수의 조언에 아버지는 큰 고심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도 고등학교 때까지 축구선수를 하셨지만 선천적으로 지구력이 약해서 선수 생활을 포기하셨다. 아버지 역시 나의 한계를 모르셨던 것은 아니었다. 평소 테니스를 하면서도 나의 발전 가능성을 계속 생각해 보셨을 것이었다. 아버지와 이형택의 만남이 성사된 무렵에 나의 테니스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나를 키워보겠다고 부모님께 스카웃 제의를 했다. 그 결과 고심 끝에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다. 일주일만 더 일찍 스카웃하시지.

      

 당시의 나는 부모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7년을 가까이한 테니스를 하루아침에 포기하기에는 그렇게 내가 쿨하지 못했다. 몇 달을 방황하고 부모님께 비밀로 하고 테니스를 치러가기도 했지만 본인의 한계는 본인이 제일 잘 아는 법. 그렇게 스스로 인정하고 그날 이후 테니스 라켓을 깨끗하게 닦고 옷장 속에 고이 넣어두게 되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얼마 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우리는 아쉽지만 당연하게도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또 메달을 따지 못하면 그만한 상금이 돌아오지도 못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분은 '4위를 한 선수들의 표정'을 본적이 있나. 이번 올림픽에서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즐거워하고 후회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아쉽고 슬프겠지만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에 후회가 없을 만큼 열심히 준비하고 경기에 임했기에 나올 수 있는 표정일 것이다.     


 '어쩌면, 테니스도 내 인생의 올림픽처럼 아쉬움 없이 최선을 다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내 어린 시절, 테니스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과 추억들을 인생의 배움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렇게 나는 또 다른 꿈을 향해 발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과정이라면 그 과정에서 분명히 배우는 것이 있고, 그 배움들이 쌓여 결국 지금의 내가 되어 있을 테니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만약 테니스를 계속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럼, 무조건 성공했지. 대회에서 우승까지 했을 거야.’


 물론 안 해봤으니 결과는 아무도 모르는 법. 아무도 모르는 미래는 내 마음대로 정해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말하고 다닌다.     


 ‘나 ? 5년 뒤 무조건 성공할 거야. ’     

 

 아무도 모르는 내 미래를 마음대로 정해본다. 미래로 가는 그 과정으로 가는 길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과정이라면 난 5년 뒤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인생의 셋트에서 꿈을 담은 서브를 힘차게 날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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