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행사 모임에 가면 우리는 단출하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아무리 먼 거리를 며칠씩 가도 전혀 부담이 없었다. 언니 오빠네는 딸린 가족들이 많으니 며칠씩 여행 가는 것을 싫어했지만, 우리는 달랐다.
부모님들에게 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동일했기에 한 달에 한 번씩 회비를 걷고 있었다. 여름마다 한 번씩 고기 구워 먹으러 휴양림에 가서 하루 놀다 오자는 뜻이었다.
내가 작은 오빠보다 먼저 결혼은 했지만 아이가 여전히 없었고 오빠는 결혼하자마자 이듬해에 아들을 낳았다. 그러면서 아버지에게는 바닷가에서 배를 두 척이나 갖고 계신 사돈어른이 생겼다. 꼭 한번 놀러 오라고 했는지 아버지가 큰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가족 여행이 시작됐다. 사돈댁에서 여름에 한 번 가족들과 놀러 오면 바다낚시를 해주겠다고 연락이 왔고, 우리 사 남매는 여름휴가를 맞췄다.
여행에 대한 작은 바람들이 서린 우리의 짐은 언니네, 오빠네 가족들의 보따리와는 달랐다. 우리 부부의 여행 짐은 엄마네 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출하고 간소한 옷보따리와 생필품이 전부였다.
언니오빠의 여행 가방은 아이들의 물건으로 가득 찼다. 장난감, 기저귀, 우유병, 간식거리, 여분의 옷가지들... 그 많은 짐들은 아이들을 위한 준비와 사랑의 증거였다. 우리의 가방은 그저 차갑고 공허했다.
난임 부부인 나는 언젠가 내 아이를 위해 가방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아이의 작은 옷가지 하나, 장난감 하나로 여행 가방이 북적이길 간절히 바랐다. 지금의 단출함이 얼마나 가슴 아픈 침묵인지 알았다.
막내인 우리 가족이 애가 없기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고 가야 했다.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는 챙길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을 챙겨야 했다. 당연한 마음으로 처음에는 즐거웠다. 온 가족들이 모여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정말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언니네 가족 4명, 큰 오빠네 가족 4명, 작은 오빠네 가족 3명, 우리 부부 2명, 부모님 2명 - 대가족의 움직임이었다. 엄마는 가족들 먹을거리 챙기느라 이사 가는 집만큼 먹을 것을 챙겼다. 누가 보면 일주일 다녀오는 만큼의 짐을 챙겼다. 엄마말로는 사돈네 선물이랑 농사지은 쌀이랑 마늘이랑 등등이었다.
여행 가서는 사 먹어야 하는 맛도 있는데 옛날 사람인 엄마는 손수 해먹이겠다고 닭백숙, 닭볶음탕, 삼겹살, 된장찌개 등등 김치, 상추, 오이 고추에 완전히 이사 가는 집만큼 보따리를 쌌다.
그뿐인가 과일에 소주, 음료까지.
두 시간 넘게 차 3대가 나란히 움직였다. 여행은 즐겁고 행복해야만 하는데 그랬을까...
도착하자마자 남자들은 사돈어르신이 준비하신 바다낚시를 나갔고 나머지 아이들과 여자들은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했다. 말로는 여행이지만 여자들은 집 밖을 나와서도 달리진 부엌에서 주방일을 똑같이 하는 입장이었다. 언니와 올케들은 모두 챙겨야 할 아이들이 많으니까 몸이 열개라도 바빠 보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제발 내 이름 좀 그만 불러줘요.'여기서도 '선미야', 저기서도 '선미야', '선미야'... 내 이름이 이날 백번도 더 불려 닳을뻔했다.
엄마와 아빠는 편하니까 막내인 내 이름을 마르고 닳도록 불렀다. 딸이나 며느리를 부르려면 아기를 업고 있고 우유 주고 있으니 잔심부름은 내 몫이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우울한 마음이었는데 조카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조카들이 커나가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나도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되었다.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걱정) 내가 고민을 너무 많이 하고 걱정한 탓인지 임신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난임 부부에게 여행은 어쩌면 임신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그런데 온 가족들과의 여행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펜션이라고 해서 믿고 갔는데 바닷가의 펜션이 요즘처럼 근사한 곳이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에서나 가봤을 만한 노후된 펜션이었다.
언니네 오빠네 아이들은 낯설어서 울고, 조금 걸어 다니는 아이들은 모기와 벌레들이 달려든다고 뛰어다니기 바빴다. 혼이 빠질 정도로 여행은 부산스러웠다. 여러 개의 상을 차리기도 어려워서 둘러가면서 먹어야 했다.
여행이 아니고 피난연습 같아 보였다. 신혼시절 아기가 생기지 않아 이런 여행에 핑계를 만들어서 빠질 수도 없었다. 문득문득 여행에 대한 추억을 얘기하면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다들 온 가족이 가는 여행에 대한 로망을 갖고 갔던 바다낚시 여행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우리의 여행 짐은 앞으로 다가올 꿈에 대한 희망이자, 아직 채워지지 못한 결핍의 상징이었다.
우리의 여행 가방은 채워지지 못한 꿈의 무게를 싣고, 기대와 좌절 사이를 오가는 난임부부의 침묵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