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똑같은 하루가 밝았다.
'이번엔 달라질 거야'라고 수없이 다짐했던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진료 예약표를 손에 쥐었다 폈다 하며 망설이는 내가 싫다. 시간은 달팽이처럼 더디게 흐르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마저 잿빛이다.
한숨을 크게 내쉬며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고 했던 남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그의 말에 대꾸할 힘도 없고, 할 말도 없다. 그도 자신이 바보 같아진다며 마무리하지 못한 말을 삼켰다. 우리는 서로의 침묵 속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찾는 중인지도 모른다.
자꾸만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이 커질 때면,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그 생각조차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한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마치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느릿느릿 움직인다. 때가 되어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몸을 움직일 의욕조차 사라진 채 그저 누워있다. 오지도 않을 전화를 기다리며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나라는 존재가 점점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면 엄마를 찾게 된다. 따스한 엄마, 내 얘기를 가장 잘 들어주었던 엄마다. 엄마에게 이런 내 마음을 말하고 싶어 엄마로 저장된 숫자 '1'을 길게 눌렀다 떼었다를 반복한다. 몇 번의 고심끝에 길게 "꾹"눌러 발신에 성공했다. 엄마는 늘 그렇듯 다급하게 전화를 받으셨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내 속마음이 들킬까 봐 일부러 목소리를 밝게 해서 "그냥 전화했어"라고 했다. 사실은 엄마에게 투정도 부리고 "나 좀 어떻게 해줘"라고 응석도 부리고 싶었는데, 내 말 한마디에 속병이라도 날까 봐 차마 하지 못하고 엉뚱한 말만하다 끊었다.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의 삶이 얼마나 애처로웠을지 이해하게 됐다. 한때는 엄마처럼 되고 싶었는데, 지금의 내 삶은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매일 밤 휴대폰 연락처를 뒤적이며 내 마음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을 찾지만, 번호들은 그저 의미 없는 숫자일 뿐이다.
핸드폰은 늘 진동 모드다. 남편은 왜 소리로 해놓지 않느냐며 투덜대지만, 나는 "수업 들을 때 바꿔놓은 걸 깜빡했다"는 핑계를 댄다. 그는 내가 시어머님의 전화를 피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시어머님은 곧장 아들에게 전화해 내 안부를 물으시니까. 나는 어린아이도 아닌데, 매일같이 확인하듯 물어오는 안부가 숨막히게 부담스럽다. 아니, 어쩌면 그저 도망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이제는 거울 속 내 모습조차 낯설어졌다. 병원 진료실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는 점점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누군가 이 어둠에서 나를 꺼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가 느끼는 이 고립된 섬의 깊이를 모를 테니, 오늘도 나는 그저 달력의 날짜만 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