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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Jun 22. 2021

고즈넉한 행복

내 인생 37살에 찾아온 불안장애 극복기 - 11


아침에 일어나 아이에게 아침을 먹이고, 8시에 스쿨버스를 태우고 손을 흔들었다.


남편의 간단한 아침을 챙겨주고 잘 다녀오라고 배웅했다.


그러고 나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온 집을 환기시키고, 세수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베렛을 껴안고 이불속을 뒹굴기도 하고, 아니면 창가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기도 했다.


아무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고, 아무도 날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가 고파지면 애호박과 두부를 큼직하게 썰어 된장국을 끓이고 계란 프라이 2개를 부쳐서


밥을 먹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휴식을 취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정말로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서둘러 머리를 감고 말리고 옷을 어제와는 다른 옷으로 고른 다음 서둘러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를 챙기고 출근하는 길에 시간이 촉박해 김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뛰듯이 걷지 않아도 되었다.


9시에 있을 회의와 1시 반에 있을 회의를 챙기지 않아도 되었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유 없는 상사의 짜증을 인내심 있게 듣지 않아도 되었다.


이상한 보육 아줌마를 감내하며 통화를 하거나, 아이를 인계받기 위해 뛰어서 퇴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그저 시간을 흘러가는 데로 두었다.


거실 창가에 누워 하늘을 보고 있으면, 가만히, 아주 천천히 구름이 흘러갔다.


나는 모양이 조금씩 흩어지며 변하는 구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들숨과 날숨을 느꼈다.


내가 공기가 되었다가, 공기가 내가 되었다.



그리고 구름을 보는 것이 지루해지면 나는 그림을 그렸다.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그리면서 난 그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나는 하울과 공중을 날아가는 소피가 되기도 했고, 하쿠가 준 주먹밥을 먹으며 우는 치히로가 되기도 했다.


토토로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는 메이가 되기도 했고, 고양이 버스를 만나 놀란 사츠키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빗자루를 타고 선물을 배달하는 마녀 키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해준이가 집에 돌아왔다.


내가 "해준아~ 어서 와~"라고 말하며 맞이하면, 그는 내 얼굴을 보는 순간 환하게 웃었다.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고 같이 샤워를 한다.


그는 물줄기를 맞으며 신나는지 펄쩍펄쩍 뛰며 소리 내어 웃는다.


나는 그와 같이 웃으며 머리를 감겨주었다.


물줄기가 따뜻하고 부드럽고 행복했다.




나는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나에게 고요한 행복이 왔다.


천천히 숨을 쉬고, 천천히 나만을 위해 요리하고, 천천히 그림을 그리고


귀여운 아이를 맞이하고, 그와 같이 물줄기를 맞이하는 일상



남편이 집에 오면 담소를 나누고 투닥거린 후 꼭 껴안고 잠들었다.




비로소 우리는 처음으로 '가정'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 아빠, 아이라는 '가족구성원'은 있었지만, 항상 '가정'은 없었던


불완전했던 우리에게.




고즈넉한 행복이 찾아왔다.


        

제목  :  휴식   /  캔버스 유화,  50cm × 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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