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의미

by 고갱이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오늘은 월요일. 보나 마나 아침 6시일 것이다. 나는 이미 잠에서 깨어있었다. 알람보다 내 몸이 먼저 아침을 알고 나에게 알려준 덕분이다. 사실 알람을 맞춰둘 필요 없다. 하지만 알람 설정을 변경하기란 아침마다 무의미한 알람 음을 듣는 것보다 귀찮다. 휴대폰에서 앱을 열고 알람 끄기로 돌리기까지 과정이 나에게는 너무 멀다. 덕분에 매일 목적 없는 알람이 울리고 있다. 아니다.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은 주말인 것이니, 하루하루가 똑같은 나에게 알람은 오늘이 주중인지 주말인지를 알려주는 목적이 있다.

일어나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연다. 한낮은 여름을 방불케 할 만큼 뜨거운 볕이 내리쬐지만, 새벽은 벌써 가을이 분명하다. 썰렁한 바람에 솜털이 오소소 돋는다. 이불을 세로로 한 번, 가로로 세 번 접어 갠 뒤 베개 밑에 두고 방문을 연다.


내가 창문을 여는 소리에 개들이 잠에서 깼나 보다. 방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던 듯 개 두 마리는 나를 향해 연신 꼬리를 흔들며 앞발을 들고 선다. 장모 치와와와 마르티스다. 귀찮다. 발로 쓱 밀었더니, 놀아주는 줄 알고 슬리퍼를 물고 늘어졌다. 아직 사료를 먹을 시간이 아니라 개 껌을 던져줬다. 개들이 얌전해진 사이 나는 집안의 앞뒤 창을 열고 배변 패드를 치운다. 밤사이 건조된 부엌 식기들을 정리하고 거실에 널브러져 있는 것들, 리모컨이나 쿠션, 책, 아이스크림 막대 등을 치운다.


6시 30분이 되면 그녀가 나온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곧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지는 샤워기 물소리에 15분 후 드라이어가 작동한다. 그녀의 루틴에 맞춰 나는 7시까지 아침 식사를 차려야 한다. 접시에 잘 구워진 토스트를 놓고, 위에 버터 한 조각을 올리고, 계란 프라이와 과일 몇 조각을 담는다. 작은 컵에 요거트를 담고 꿀을 뿌린다. 커피는 식지 않도록 제일 마지막에 따른다.


핸드폰을 보면서 아침 식사를 마친 그녀는 7시 15분에 양치질을 하고 30분에 집에서 나간다. 현관 밖에 새벽 배송 박스가 도착해있다. 나에게 박스채 건네며 정리하라 말한다. 무항생제 오리 안심 육포, 무항생제 순 닭가슴살, 아이스크림, 바이오 액티브 덴탈 껌 그리고 칫솔이 나왔다. 고기와 아이스크림의 포장이 낯설어 돋보기를 찾아 쓰고 뒷면에 깨알같이 적힌 정보를 읽어보니 버젓이 애완동물용이라 적혀있었다. 바이오 액티브 덴탈 껌이나 칫솔은 찾아볼 것도 없겠다. 이런 택배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이해하기 힘든 세계다. 냉동실 한편에 아이스크림을 넣고 나는 그 옆의 비비빅을 꺼냈다.

"나는 한 개에 4백 원짜리 비비빅을 먹는데 네 아이스크림은 얼마나 하냐..." 내 입에 들어갈 때마다 줄어드는 아이스크림을 빤히 쳐다보는 치와와에게 물었다.


아침 식탁을 치우면서 남은 커피를 마셨다. 식긴 했지만, 고급 원두여서 그런지 뒷맛이 깔끔하다. 그녀가 강릉인가 속초에서 주문한 원두라 했다. 나는 비어있는 그녀의 방으로 가서 창문을 연다. 침대 시트를 걷어내고 헝클어진 옷가지와 스타킹 등을 빨래통에 넣는다. 어질러진 방을 치우다 보면 전날 그녀가 밤늦게까지 뭘 하다 잤는지 알 수 있다. 책상 위에 맥주 캔과 먹다 남은 과자봉지가 뒹구는 거로 봐서 아마 노트북으로 영화나 웹툰을 봤을 것이다. 옷 포장 비닐이 찢겨있으니 오늘 입은 티셔츠는 새것이겠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택을 주어 세탁법을 눈여겨봤다.


세탁기를 돌린다. 커피 얼룩이 묻은 레이온 블라우스는 표백제를 발라 부분 세탁을 한 뒤 세탁 망에 넣고 청바지는 뒤집어 지퍼를 잠갔다. 손바닥만 한 속옷은 도대체 이런 것이 어떻게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겉에 입는 옷인지 속옷 인지도 헷갈릴 만큼 색깔이 화려하기도 하다. 비키니 수영복 같기도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운동복도 빨아야 한다. 그녀는 3년째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운동용 가방을 열어보니 역시 처음 보는 레깅스와 브라가 나온다. 필라테스라는 게 무슨 운동인지 잘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운동복을 사기 위해 운동을 다니는 것 같다.


집 안 청소를 시작했다. 먼지를 털고 진공청소기를 돌린다. 그녀의 침대 위는 늘 긴 머리카락과 개털로 가득하다. 매트리스 위를 기어 다니며 테이프 클리너 두세 장으로 밀어도 부족하다. 청소기 헤드를 틈새 용으로 바꿔 끼워 구석구석까지 민다. 매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알레르기성 비염이 재발한다. 가뜩이나 환절기라, 그녀의 신경이 날카로워질까 두렵다.


점심시간이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은 탓에 허기졌다. 냉장고를 열어 어제저녁에 그녀가 먹고 남긴 김치찌개와 부추전을 데웠다. 한술 뜨고 샤워를 하며 화장실을 청소했다. 등까지 긴 파마머리인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수구를 가득 메워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는다. 면봉으로는 역부족이라 나무젓가락으로 하수구 머리카락을 제거했다. 알몸으로 쪼그리고 앉아 하수구를 파는 내 모습이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다. 옷을 버려 빨랫감을 늘이는 것보다 볼품없는 모양새가 차라리 낫다. 어차피 빈집이라 누가 볼 일도 없다. 뚜껑이 안 닫힌 샴푸, 헤어 에센스, 바디로션 등을 정리하고 빗에 박힌 머리카락을 빼내는 것으로 화장실 청소가 끝났다. 이제 개들을 산책시킬 차례다.


개 산책은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쉬운 일이다. 목줄을 한 개들을 끌고 삼십 분 정도 집 주변을 돌기만 하면 된다. 운이 좋으면 내 또래의 다른 개 주인들과 수다를 떨 수도 있다. 그들에게 굳이 이 개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은 할 필요 없다. 가끔 애완견 두 마리와 함께 노년을 기다리는 우아한 중년 부인처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개 밥그릇에 사료를 담아주고 마트에 갔다. 어제 그녀가 매콤한 오징어 볶음이 먹고 싶다 했다. 국내산 생물 오징어와 맥주를 샀다. 그녀는 요즘 IPA라고 적힌 맥주만 사 오라고 한다. 젊은 시절, 소주만 마셨던 나는 맥주 맛을 구분하지 못하겠다.


쳇바퀴 돌듯 일상이 루틴으로만 채워졌는데 계절은 바뀌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길이 쌀쌀했다. 올해도 벌써 반소매 입을 날은 다 지난 듯하다. 집에 돌아와 그녀의 장롱을 열었다. 철 지난 리넨 티셔츠나 숏팬츠, 민소매 원피스 등을 꺼냈다. 옷을 살펴서 땀 자국 같은 얼룩이 있는 옷은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이다. 얼룩은 늙은 피부에 박힌 검버섯과 같아 시간이 오래될수록 지우기 힘들다.


그러고 보니 여름 어느 날, 이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나서는 그녀는 아주 아름다웠다. 하이힐까지 신은 뒷모습이 아찔했다. 드러난 팔다리가 어찌나 가늘고 긴지 나의 투박한 손이 닿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았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는 그녀의 고갯짓 한 번에 이는 바람에도 나풀거렸다. 나도 모르게 조심하라고 말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만 지었다.


나는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녀의 원피스를 입었다. 밑에서부터 올린 원피스에 팔은 끼워 넣었지만, 허리춤의 지퍼가 도통 올라가지 않는다. 그 상태로 거울을 봤다. 부스스한 머리는 어느새 절반이 넘게 하얗다. 마지막으로 염색한 때가 기억 안 난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팔에는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반점들이 묻어있다. 지워지지 않을 얼룩이다. 밑으로 뻗어 나온 다리는 탄력은커녕 무릎 위로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나에게도 이런 옷이 맞던 시절이 있긴 있었을까.


원피스를 벗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려보니 피다. 이상하다. 나는 분명 지난겨울에 산부인과에서 폐경 진단을 받았었다. 그런데 다시 생리를 하다니.


생리대가 없는 나는 그녀의 것을 빌려 쓰기로 했다. 매일 그녀의 방을 드나들며 청소하고 정리하지만, 서랍은 열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허락 없이 그녀의 비밀을 몰래 엿보는 것 같아 살짝 긴장되기도 한다. 내 기억에 속옷 아래 서랍에 생리대가 있었다. 나는 매번 세탁한 속옷을 정리하지만, 생리대 준비만큼은 그녀가 직접 했기에 좀처럼 열어볼 일이 없었다.


서랍 안에는 생리대가 단 한 개도 없었다. 텅 빈 서랍에는 생리대 대신 이상하게 생긴, 종 모양의 보라색 고무 덩어리 두 개가 뒹굴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감촉의 부드러운 종은 지름이 3cm 정도 되었고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재질만 봐도 소리를 내기 위한 종은 아님이 틀림없다. 아무리 살펴봐도 도저히 무슨 물건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생리대를 사기 위해 마트에 가야 했다. 예상치 못한 외출이다. 지금 마트에 다녀오면 그녀의 저녁 식사 시간이 30분 정도 늦어질 것이다. 서둘렀다. 마트에서 돌아오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돌아와 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시각 7시 10분은 벌써 5년째 어김이 없다. 늦는 날은 어김없이 그 전날에 알려온다. 그녀와 얼굴이 마주쳤다. 눈빛만 봐도 피곤하고 허기져 보인다. 미안해진 나는 화장실 갈 생각도 못 하고 허둥지둥 부엌으로 달려가 밥을 안치고 오징어 볶음을 했다. 다행히 손질된 오징어라 빠르게 할 수 있었다. 7시 40분 식탁에 앉아 오징어 볶음 한 젓가락을 입에 넣은 그녀의 미간이 풀어진다. 이제야 살겠다는 표정이다. 나도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에게 그녀가 맥주캔을 따며 묻는다.


"엄마, 아까 어디 갔다 왔어?"

"마트. 야, 나 갑자기 생리를 한다. 네 것 좀 쓰려고 했는데 못 찾겠길래 급하게 다녀왔어."

"응, 그랬구나."

배부른 그녀는 개들을 무릎에 앉히고 아침에 배달 온 아이스크림을 먹이며 장난친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가지만 얼굴에는 손에 들고 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순수한 웃음이 가득하다. 개 전용 아이스크림이라니 그 철없음에 고개를 내젓다가도 이내 저런 것에 웃으며 행복해할 수 있는 젊음이 부럽다.


"그런데 엄마, 오늘은 내 예정일인데 엄마가 하네. 안 그래도 귀찮았는데 이번 달은 엄마가 대신한 거로 이렇게 넘어가면 좋겠다. 히히..."


그 옛날 내가 딸의 임신 사실을 알렸을 때, 시어머니는 시누이의 등을 후려쳤다.

"이게 그렇게 샘났냐! 그렇게 질투 났어?!"

한 달 후 시누이는 임신 4개월인 상태로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젊은 게 그렇게 샘났냐! 생리가 그렇게 질투 났어?!"

그런 게 아닙니다, 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나는 식탁을 치우다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나저나 얘, 그 말랑거리는 종은 뭐냐…?



-끝

이전 03화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