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복은 부엌에 들어섰다. 살짝 열린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벌써 여름이 다 지나갔나 보다. 속옷 바람으로 지낼 수 있는 날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긴 파자마를 어디에 뒀더라? 전자레인지를 열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소시지 비닐의 끝부분을 2cm가량 뜯어 레인지에 넣고 타이머를 맞췄다.
위이이잉...
빨간빛 속에서 소시지가 돌아가는 것을 바라본다. 10, 9, 8... 시간이 줄고 비닐도 쪼그라든다.
땡, 소리와 동시에 불이 꺼졌다. 30초밖에 안 돌렸는데도 비닐이 제법 뜨겁다. 재복은 손끝으로 끝부분만 살짝 잡고 소리쳤다.
"얘, 너 진짜 한 잔 안 할 거야?"
"네. 괜찮아요. 아버님 드세요." 며느리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이 소시지 맛있는데. 그럼 나 혼자 먹는다!" 며느리의 메아리가 끊어졌다.
한 달 전 아들 내외가 집으로 들어왔다. 말은 엄마 없이 아버지 혼자 어떻게 사시게 하냐고 했지만, 혼자 산 지 벌써 3년이 지난 후였다. 재복의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였다. 평생 재복 옆에 딱 붙어서 손과 발이 되어주었다. 발병하고도 돈 아깝다고 병원치료를 받지 않았다.
"주식이고 땅이고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은행에 넣어두기만 해요. 돈을 갖고 있어야 자식들이 무시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간암 말기였다. 의사는 드라마처럼 3개월을 얘기했고, 아내는 정확히 114일 만에 죽었다. 손과 발이 없어진 재복이 혼자 남았다.
딸이 아빠는 평생 세탁기 한번 돌려본 적이 없으니 이제라도 배우라고 떠들었다. "잘 들으세요. 빨랫감을 넣고 문을 닫고 세제를 이 정도 붓고 전원을 켜고..." 앞으로 엄마가 없는 이 집에는 올 일 없다는 것처럼 쏘아붙인다.
"청소기는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미시고요, 귀찮아도 이불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빠세요. 안 그러면 냄새나요. 식사는..." 차갑다.
"그만해라. 내가 알아서 한다." 귀가 아파진 재복은 짜증스러웠다. 얘는 누굴 닮아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재복은 혼자 살기에 금방 익숙해졌다. 빨래나 청소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밥은 집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면 간단했다. 아침은 사장과 형 동생 하는 관계인 설렁탕집에서 먹는다. 설렁탕집 사모는 매번 재복에게 특별 서비스로 계란 프라이 한 장을 부쳐내 준다. 아내만큼 예쁜 사모다. 운이 좋은 날, 다시 말해 설렁탕집에 손님이 별로 없는 날에는 사장과 해장술도 마실 수 있다. 점심은 재복이 운영하는 부동산 사무실에서 배달해 먹는다. 오후 두 시 넘어 짜장면이나 짬뽕, 볶음밥 중 하나를 주문하면 사장이 직접 들고 온다. 재복은 그렇게 찾아온 중국집 사장과 함께 두어 시간 바둑을 둔다. 아내가 있을 때는 잔소리 때문에 쉽게 갖지 못했던 저녁 술자리도 마음 편히 갈 수 있다. 골목에 있는 칼국숫집, 횟집, 족발집, 냉면집, 삼겹살집, 중국집, 설렁탕집, 노래방 사장들은 모두 셋만 모이면 소주 대여섯 병을 비우는 주당들이다.
밤 11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복은 홀가분했다. 칠십이 다 돼서야 평생 몰랐던 자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궁핍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밀려다녔던 어린 시절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열여덟, 가난으로부터 도망쳐 도시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재복은 그 징글맞은 가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버렸다. 생활력이 강한 아내는 밤늦도록 고깃집에서 불 피우다 돌아온 그를 깨워 공인중개사 자격증 새벽반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지금 이 사무실을 차릴 수 있었다. 재복의 부동산 사무실은 여전히 '성실 복덕방'의 간판을 달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엄마 기일에 맞춰 찾아온 아들이 재복이 혼자 사는 집으로 들어오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그저 아버지가 혼자 계시는 것이 마음 쓰여서란다. 옆에 앉은 며느리는 무표정했다. 골목 사장들에게 얘기하니 다들 부러워 죽는다.
"효자네 효자야."
"아들이 효자인가? 며느리가 효부지. 요즘 세상에 누가 혼자 남은 시아버지랑 살려고 하겠어?"
"최 사장 늦복이 터졌네."
재복은 아들네 가족이 들어온 뒤로 더는 불 꺼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간 불이 꺼져있는 집이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이 켜져 있는 집은 좋았다. 무엇보다 부동산 문을 닫는 일요일, 저녁을 함께 보낼 식구가 있다는 사실이 제일 좋았다. 며느리는 재복만큼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 10년이 넘도록 몰랐던 사실이었다. 처음 며느리와 감자탕에 소주를 마신 재복은 기분이 좋아 세 병이나 마시고 춤을 췄다. 다음 날부터 일요일이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3일을 못 참고 퇴근 후 곧장 집으로 갔다. 냉장고에는 항상 시원한 소주가 가득했고 재복은 며느리가 요리한 어묵탕이나 부대찌개, 순대 볶음이나 곱창전골을 먹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아들 며느리와 함께 마시는 술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아냐며 골목 사장들에게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다.
어제는 식탁에 회와 매운탕이 있었다. 재복이 가장 좋아하는 민어회다. 두툼하게 썰린 회 한 점을 초고추장에 듬뿍 찍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소주 한 모금으로 뒷맛을 싹 씻어 넘기는 순간, 재복은 말했다.
"내가 오늘 하루를 위해 평생을 살았구나. 더는 바랄 게 없어."
재복의 잔에 술을 따르던 아들이 자세를 가다듬고 말을 시작했다.
"저기.. 아버지. 저희가 실은 작년에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어요. 그런데 아시겠지만, 요새 규제가 너무 심해져서 중도금 대출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전에 살던 집 전세금을 빼서 중도금을 냈어요. 올해 말까지 잔금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좀 도와주실 수 없으실까요?"
"아 그래? 잘됐네! 축하한다! 얼마나 필요한데?"
"세금까지 하면 11억쯤 돼요. 11억 8천 정도."
"컥.....! 뭐? 야, 내가 그런 돈이 어딨냐?" 매운탕에 입천장이 데었다.
"제가 알아보니 이 집을 팔면 그 돈이 딱 되거든요. 그럼 대출 없이 새 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 집이 얼마나 한다고 그 돈을 대?"
"여기 실거래가가 십이삼 억하잖아요? 14억에 내놓으면 못해도 13억 5천은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저보다 더 잘 아실 거로 생각했는데요. 요새 부동산 많이 올랐잖아요. 그래도 이 동네는 서울에서도 변두리라 이제 오를 만큼 다 올랐을 거예요. 재건축하지 않는 이상 더는 안 오를 거라고요."
"그럼 난 어디 살고?"
"저희랑 같이 사세요. 29평이라 다섯이 살기 조금 좁긴 한데 돈 벌려면 불편해도 그렇게 해야죠. 몸테크예요. 그 집에서 10년만 버티면..."
"야, 난 사무실도 여기고 친구들 다 여기 있고. 이 동네에서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어디로 가냐..."
"아 그럼 어떻게 해요? 회사 사람들이 저보고 로또 당첨됐다 해요. 얼굴 볼 때마다 밥사라 한다고요. 이미 당첨된 로또를 갖다 버릴 수는 없잖아요. 분양가가 15억인데 그 주변 시세는 최소 30억씩 하는 동네에요. 다른 건 생각할 것도 없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들어가야 해요. 정 저희랑 살기 싫으시면 이 동네 전세를 알아보시던가요."
며느리를 쳐다봤다. 재복은 며느리가 아들을 말려주길 바랐다. 며느리는 나의 술친구 아니던가. 하지만 며느리는 무표정하게 앉아 소주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음 날, 냉장고에는 술이 없었다. 일요일 저녁인데도 파스타가 올라왔고, 손자들이 먹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재복은 한마디 할 뿐이었다.
"맛있냐? 많이 먹어라."
파스타에 속이 더부룩해진 재복은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요즘 주변 아파트가 거래되는 금액이 커져서 한 달에 한두 건만 성공해도 재복의 1인 생활비 정도는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다. 아내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하고 죽는 날까지 돈, 돈, 돈, 절대 돈을 갖고 있으라 그렇게 신신당부했나 보다. 재복을 그 새벽,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을 공인중개사 학원으로 밀어 넣던 아내의 표정을 떠올렸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아내가 남겨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동네 빌라의 전·월세 물건을 살펴보았다.
방에 들어온 재복은 비닐봉지에서 소주를 꺼내 따랐다. TV를 켜고 소시지 한입, 소주 두 잔, 소시지 한입, 소주 두 잔, 마지막 소시지 한입, 남은 소주를 모두 비우고 누웠다. 팬티 속에 손을 넣어 엉덩이와 허리춤을 긁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중국 무협 드라마의 장면들이 웅크린 재복의 등을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