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전화다. 아기가 태어났다는 말에 내처 병원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내가 아들을 낳던 날을 생각했다.
헤아려보니 꼬박 삼십 년 전 여름이었다. 주변의 임신한 여자들은 산달이 되면 친정으로 내려가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워 해산하고 산후조리라는 것을 한 뒤 백일쯤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나의 친정은 딸의 산후조리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3년째 누워있는 환자가 있는 집에 부른 배를 내밀고 들어가기에 나는, 너무 장녀였다. 시골에서 농사일에 허덕이는 시부모 사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삼복더위에도 서늘함에 몸서리쳐지는 수술실 한가운데서 아들을 낳았다. 3일 후 남편은 나를 퇴원시키자마자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자신의 업무를 옆자리 주임이 대신하고 있다며 쫓기듯 오가는 사람을 붙잡을 수 없었다. 텅 빈 집에 갓난아기와 단둘이 남은 나는 어찌해야 할 바 몰랐다. 슬레이트 지붕이 달궈질 대로 달궈진 8월, 바람 한 점 들지 않은 창이라도 열어야 할지 닫아야 할지 몰랐다. 산모가 바람 들면 안 된다던데 더워도 참고 연탄을 떼야 하는 건 아닐지 양말이라도 신어야 하는 건지 몰랐다. 얼굴이 시뻘건 아기는 싸개로 싸 둬야 할지 벗겨야 할지 몰랐다. 아기가 운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허겁지겁 젖을 무는 입을 보고 나도 울었다. 배가 고팠다. 배가 너무 고픈데 밥이 없었다. 처음으로 출산을 경험한 날은 내가 처음으로 아기 엄마가 된 날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축복이고 행복인 이 날이 나에게는 지독한 배고픔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아들에게 임신 소식을 듣던 날에도, 기쁨과 동시에 이날의 허기가 떠올랐었다. 내 며느리는 절대 배가 곯게 둬서는 안 된다.
출산 준비를 하던 며느리에게 퇴원 후 곧장 산후 조리원으로 갈 예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갓난아기도 봐주고 산모 밥도 주고 산후조리도 해주는 곳이란다. 조리원에 있는 이 주일간은 면회가 안 되니 아기 얼굴을 보려면 병원에 있을 때 오셔야 한다고, 아들이 말했다.
"조리원에서는 왜 못 봐?" 내가 물었다.
"다른 산모와 아기들도 있으니까요. 감염 문제도 그렇고 아무래도 여러 사람 드나들어 좋은 것 없잖아요. 다들 쉬면서 몸조리하려고 들어온 곳인데."
졸지에 세균 취급을 당한 것 같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나는 서운한 기색을 내비칠 수 없었다. "하긴 옛날에도 삼칠일 동안 아기를 볼 수 없었지. 그럼 병원에서 나오는 날이 아니라 조리원에서 나오는 날이 문제겠구나."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서 9층을 눌렀다. 9층에는 1인실이 모여있다. 며느리는 은은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병실에 누워있었다. 출산의 긴장이 아직 남은 듯 피곤해보여 안쓰럽다. 고생 많았다, 푹 쉬라 한 뒤 신생아실이 있는 3층으로 향했다. 나는 유리창 너머 하얀 번데기 같은 10여 명의 아기 중 내 아들을 한눈에 찾아냈다.
"어머 저깄네! 저기!!! 우리 아들 판박이야!!"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유리창을 통통 쳤다. 간호사가 득달같이 달려 나와 화를 낸다. 괜찮다. 상관없다. 어쩜 저렇게 제 아빠랑 똑 닮았을까? 나는 30년 만에 내 아기를 다시 만난 반가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2주일 후 나는 양지와 산모용 기장 미역을 사서 곰솥 가득 미역국을 끓였다. 락앤락 대형 사이즈 두 통에 나눠 들고 택시를 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바로 냄비에 부어놓을 것이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 훌훌 넘기면 되니 산모 끼니 걱정은 할 것 없다. 괜히 미안했던 마음이 가시고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젖살이 올랐을 손주를 기대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산모와 아기, 둘만 있으리라 생각했던 집 안에는 휴가를 낸 아들과 사돈까지 계셨다. 식탁에는 포장도 채 덜 풀린 선물용 빵과 떡, 과일이 쌓여있고 아기는 영화에서나 봤던 서양식 아기 침대 안에 누워있었다. 당혹감에 나는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아기에게 다가가자,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손 씻고 봐주세요."
아기 얼굴을 보기도 전에 나는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그사이 내가 싸 온 보자기를 풀어본 며느리가 깜짝 놀란다.
"어머니, 웬 미역국을 이렇게 많이 끓여오셨어요? 무겁지 않으셨어요?"
나는 괜찮았다고, 택시를 타서 하나도 안 무거웠다고 말하며 그릇을 번쩍 들어 냉장고로 향했다.
"많으면 한 통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어. 두고두고 먹으면 되지. 이거 한우 살코기 사다가 두 시간 푹 끓인 거라 연할 거야."
냉장고 문을 여니, 한약 봉지와 1인분씩 담긴 반찬 세트로 가득했다. 나는 겨우 틈을 비집어 국통을 밀어 넣었다.
자는 아기를 깨울 수 없어서 구경만 했다. 벌써 젖살이 올라 볼이 동그래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살짝 건드렸다. 안아보고 싶다. 얼굴을 저 볼에 비벼보고 싶다. 젖비린내를 맡고 싶다. 하지만 어색한 집안 공기가 내가 있을 틈을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현관을 나서며 말했다.
"힘들거나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라. 꼭 전화해!"
2주 후, 며느리에게 전화가 왔다. 산후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간 동안 아기를 봐주실 수 있냐고 묻는다. 나는 맵지 않게 담근 김치와 나물 두어 종류를 담은 통을 들고 집으로 갔다. 아기는 오늘도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직전에 젖 먹여서 아마 두 시간 정도는 잘 거예요. 금방 다녀올게요." 며느리가 나가고 나자 빈집에 아기와 나 둘만 남았다. 옛날에 나는 방바닥에 요를 깔아놓고 아기와 나란히 누워 뒹굴었는데, 그렇게 눈을 마주쳤었는데. 이제 아기는 아기 침대 안에만 있다. 나는 소파에 앉아야 하나, 침대 옆에 서 있어야 하나, 안 그래도 기운 없는데 그냥 맨바닥에 누워버릴까.
가져 온 반찬통을 정리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보름 전 내가 끓여 온 미역국 두 통이 들어있다. 한 통은 절반 정도 비었고, 다른 한 통은 가득한 채였다. 미역국 통을 꺼내고 그 자리에 새로 가져온 반찬통을 넣었다. 이미 쉰 듯하여 하수구에 쏟아버렸다. 통을 씻는 김에 쌓여있는 다른 설거지도 함께 했다. 부엌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닦고 걸레질을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부산을 떨었는데도 아기는 깨지 않고 잘 잔다. 오늘도 못 안아봤다. 병원에서 돌아온 며느리는 힘들게 반찬 해오지 마시라고 말한다.
그 뒤로 며느리의 출산 휴가가 끝날 때까지 몇 개월간 틈틈이 아기를 봐줬다. 그리고 복직 날에 맞춰 나는 아들의 집으로 들어왔다.
"매일 왔다 갔다 하기 힘드시니까요, 월요일 아침 7시까지 오셔서 금요일 저녁 7시까지만 계셔주세요. 주말에는 어머니도 쉬셔야죠." 아들의 말에 그러자고 했지만, 곧 후회했다. 그래도 나 정도면 젊은 할머니라 자신했는데, 월요일 새벽이나 금요일 저녁에 지하철을 한 시간씩 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겨울 새벽 6시에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서는 뒷골이 뻐근했고 가슴이 답답했다. 종일 뒤집기를 하고 기기 시작하는 아기 꽁무니를 쫓다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기 역시 녹록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밀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저들도 편히 쉬고 싶으니 주말이 되면 가라 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면 30분도 눈칫밥 같아 더 지체할 수 없었다.
일요일 밤만 되면 다시 아기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무거워졌다. 못가겠다고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몇 번씩 털어내야 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돼야지. 성가시게 하거나 짐이 돼서는 안 돼.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지각하는 일이 없도록 서둘러 새벽길을 나섰다.
오늘은 집안 분위기가 평소와 달리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얘들이 싸웠나?' 나는 막 걸음마를 시작하여 현관문까지 마중 나온 아기를 안아 올렸다. 따뜻하다.
"어머니, 혹시 오늘 병원 좀 가 주실 수 있으세요?" 토요일에 예방접종을 하였는데 어젯밤부터 열이 나고 있단다. 나는 9시에 맞춰 소아과에 데려갔다. 의사는 단순 열감기라 했다. 3일 치 약을 처방해줄 텐데 이삼 일째에 열이 더 많이 날 수 있으니 그럴 경우 해열제는 네 시간 간격으로 먹이란다. 약국에 갔다. 처방전을 본 약사가 물약 한 통과 가루 약봉지 묶음, 작은 빈 통 하나를 내준다. "식후 30분, 이 작은 병에 4mL씩 따르고 가루약 한 봉지씩 타서 흔들어 먹이세요. 처방전은 타이레놀이에요. 아기가 열이 계속 나면 집에 있는 부루펜을 2시간 간격으로 교차 투여하시고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
싱크대 앞에 선 나는 돋보기를 찾아 꺼내 쓰고 4mL를 따랐다. 병에 쓰여 있다는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아 여간 갑갑하지 않았다. 아들을 키울 때 물약은 밥숟가락에 찍 짜고 가루약은 새끼 손가락으로 개어 먹였다. 사람한테 약물 실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4mL라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아들 같았으면 그냥 숟가락에 짜서 먹였을 텐데, 중얼거리며 4mL를 측정했다. 손은 떨리고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아기는 종일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에 맞춰 구토와 설사를 반복했다. 나는 퇴근한 며느리가 외투를 벗기도 전에 아기와 약봉지를 넘기고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리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며느리는 밤새 어지간히 시달린 표정이었다. 퀭한 눈으로 새벽에 열이 올라 해열제를 한 번 더 먹였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출근했다. 흰죽을 끓여 아기에게 먹이고 약봉지에서 약을 꺼냈다. 세상 방정맞던 그 작은 약병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맞다, 어미도 갑갑했을 것이다. 세상 누가 그걸 재가면서 먹이겠냔 말이다. 난 벌써 몇 밀리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병아리 눈물만큼 먹이면 되는 거였다. 마침 약통은 거의 비어있었다.
"아, 그게 아니라 엄마가 할머니 눈이 어두운 것을 알고 아침에 먹일 약을 이 병에 따라놓고 갔구나." 나는 아기 입에 물약을 통채로 쭉 짜서 넣어줬다. 세탁기에 밤새 더러워진 이불이 차 있어서 돌렸다. 어젯밤부터 쌓여있는 설거지도 했다. 바닥까지 한 번 훔치고 나니 점심 약 먹일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남은 물약이 없다. 설거지통에도 거실 테이블에도 식탁에도 없다.
나는 안방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낮에 비어있더라도 왠지 조심스러워 이방만큼은 걸레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기가 지난밤을 보낸 곳이라 약을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봤다. 침대 위고 바닥이고 할 것 없이 옷가지와 이불이 뒤죽박죽 섞인 채 난장판이었다. "전쟁통에 폭격을 맞아도 이보단 낫겠네." 중얼거리면서 슬쩍슬쩍 이불과 옷가지를 들춰보았다.
툭...
침대에서 바닥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어제 그 방정맞은 약병이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에미가 어젯밤에 4mL를 재서 먹인 빈 통이고, 전체가 36ml... 하루 치 12mL에 새벽녘에 먹인 것 4mL를 더하면 16ml... 36 빼기 16은 20이니까... 그 20이 지금 어디 있어야 하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두근거렸다. 부엌으로 돌아와 식탁 의자에 겨우 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깨끗하게 씻어진 빈 약병이 있었다. 그럼 내가 아침에 입에 짜서 먹인 게 그 남은 물약 전부였단 말이 된다.
해열제 20mL.
내가 돌쟁이에게 복용량의 5배에 해당하는 약을 먹인 것이다. 엄지손가락만 한 약병에 담긴 약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약병에 담긴 약의 높이를 도대체 어떻게 헷갈렸을까.
시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것인가. 육체적으로 늙고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 정신까지 흔들어놓는다. 나는 이날까지 살면서 분에 넘치는 그 어떤 부귀영화 따위를 욕심낸 적 없다. 나는 오직 살면서 겪어야 했던 절박함과 절실함의 순간을, 내 자식은 모르고 살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들의 삶은 매 순간 여유롭고 평화로와 그저 부드럽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생각이었다. 인생을 먼저 살아 본 선배로서 그들 앞에 놓일 모든 거침을 예상하고 미리 치워놓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그 새로운 세상에서 흘러가는 내 시간과 저들의 시간은 달랐다. 나의 필요와 저들의 필요가 달랐다. 지금, 내가 가진 능력은 아이들의 필요에 닿지 못하고, 도우려는 나의 발버둥은 그저 짐이 되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내 분에 넘치는 욕심이었던 것이다.
아기를 바라봤다. 다행히 칭얼거리지 않고 혼자서 잘 놀고 있다. 약을 먹인지 이미 네 시간이 넘게 지났지만 별다른 증상은 보이지 않고 있다. 하늘이 도왔다. 오후에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와야겠다. 애 엄마에게는 약병을 떨어뜨려 쏟았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오늘 일은 아무도 모르고 넘어가겠지. 손주고 뭐고 여긴 그만 오고 싶다. 아니, 오면 안 될 것 같다. 여기는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다. 빨리 어린이집이나 시터를 알아보라고 하자. 나는 자신 없다. 그들에게 도움은커녕 폐만 되는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내가 없어도 어쨌든 그들은 살 것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