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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Kay Nov 23. 2021

어느 선까지 아이가 아프게 놔둬야 하는 것일까?

'기다려준다'는 것은?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에 바바라 오코너의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란 책이 있다. 주인공 조지나가 이혼한 엄마랑 동생하고 집 없이 차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거기에 조연으로 "무키"라는 이름의 아저씨가 나온다.  노숙자(?) 같은 아저씨인데 주인공 "조지나"가 잘못된 것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은 이 아저씨의 행동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도와주는 조력자의 역할...


아이들을 키우면서 소리 없는 조력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본인이 스스로 잘못된 것을 깨우치게 놔두는 것인데 이 놓아둔다는 것이 나에게 엄청난 참을성과 인내를 요구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나는 참으려고 하다 결국은 중간에 항상 끼어든다. 이 부분은 남편과 항상 많이 충돌하는 부분이다.  나는 그래도 부모로서 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고 남편은 놔두라는 입장이다.  놓아둔다는 것은 무관심하고는 또 그 차원이 다르다.  그 행동을 계속 관찰하고 있으면서 아이가 잘못하더라도 그것을 놔두고 배울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고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실수하고 스스로 배울 기회를 부모가 빼앗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편은 어렸을 때 미국에서 자랐는데 무엇이든 스스로 하는 굉장히 독립적인 사람이다.  본인은 한 번도 학교에 엄마가 깨워주고 잔소리하면서 간 적이 없다고 한다.  한번 지각을 한 적이 있는데 학교에서 문을 닫아버려 학교 끝날 때까지 학교 문밖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반복하기 싫어서 절대로 학교에 지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 선까지 아이가 아프게 놔둬야 하는 것일까? 우리 집에서 아이들의 잡일(?)등에 관여하는 주된 사람은 나다.  물론 남편도 육아에 굉장히 많이 참여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모든 활동은 전반적으로 내가 주가 되고 있다.  시간도 내가 훨씬 아이들과 많이 보내고 있는데 아이들은 신기하게도 남편과 나를 동일하게 사랑한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보통 아이들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으면 겉으로는 둘 다 좋다고는 대답하지만 사실은 더 많이 시간을 보낸 사람을 좋아해야 하지 않나?  내 말은 둘이 다 좋다고 하면 당연히 좋아해야 하지만 내심 "내가 아이들하고 더 시간을 보내고 내가 아이들의 일에 더 많이 관여하고 있는데..."란 생각이 들면 조금 서운하기도 하다.  아이들은 벌써 사랑을 받음에 있어 양보다는 질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절대 게을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의 기준에서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냉정하다시피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가 준비물을 잊어버렸다든지, 아이가 밥을 안 먹는다든지, 아이가 숙제를 안 하든지 이런 일들은 절대 잔소리하지 않는다.  본인이 안 하면 본인이 배고프고 본인이 야단맞고 스스로가 깨우치게 놔두는 선 긋는 일을 참 잘한다.  나는 애들이 숙제를 안 하면 "숙제 다 했어?"부터 시작해서 "내일 가져갈 것 다 챙겼어?"까지 잔소리를 한 다발 아이들에게 안겨준다. 


교육을 전공한 한 지인과 아이들 교육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그녀가 강조한 것이 하나 있었다.  아이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잘 살펴보면 남편은 참 잘 기다린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남편이 아이들에게 주는 사랑의 방식이다.  옆에서 사랑한다 안아주고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고 아이가 실수하면 부모가 더 아프지만 그걸 참고 옆에서 지켜보는 기다리는 사랑.  초등학교 3학년밖에 안된 우리 아이들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벌써 몸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다림을 참 못한다.  내가 미리 언 지를 안 주거나 알려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아파할 테니깐 그것을 아이들이 겪기도 전에 내가 사전에 차단시키고 내가 잔소리를 아이들에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아파하는 것을 예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이들을 사랑해서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숙제를 안 하고 있다면.  그럼 내가 미리 잔소리를 함으로써 이를 사전에 방지하려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숙제를 할 것이고 아이들은 자신이 숙제를 해야 하는 것을 깨우치기에 앞서 엄마한테 혼나지 않기 위해 숙제를 한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숙제하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아이들은 왜 숙제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없어져버린다.  나는 기다리지 못해서 두 가지를 동시에 잃어버리게 된다.  첫째는 아이가 왜 숙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깨우치는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나와 아이의 관계도 사랑을 주는 관계가 아닌 아이들이 중요성을 못 느끼는 것을 강요하는 명령하는 사람과 그것을 행하는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인내와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리면 그게 오늘이 될지 아니면 한 달 후가 될지 아니면 일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난 이 두 가지를 잃지 않고 얻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이들이 숙제를 하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이 두 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할까?  


물론 이는 내가 알기 쉽게 단편적으로 설명한 것은 사실이다.  뭐 강요를 해서라도 숙제를 하게 하는 습관을 만든다든지 일단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공부하는 습관을 더 쉽게 가질 수 있다든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 수 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스스로 인식할 때까지 시간이 엄청 소요되는데 만일 부모가 그것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인내와 참을성이 있다면 그 어떤 잔소리, 강요 보다도 소중한 교육을 아이에게 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아이들과의 관계도 명령을 주고받는 관계로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그냥 기다림이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선 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 선도 중요하다. 잔소리도 매일 하면 그것이 아이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처럼 아이들이 정말 어긋난다거나 나쁜 길로 가지 않는 한 어느 한도 내에서는 아이들이 스스로 실수하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이 굉장히 필요로 하다.  

내가 참 못하는 부분이지만 이렇게 아이들에게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잔소리로 계속해서 침범해 버린다면 내가 아무리 옳다 해도 아이들은 내 말은 절대 듣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난 자라면서 한 번도 집에서 공부하라고 강요받은 적이 없다. 그렇게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참 잔소리를 안 하셨다. 그런데 내가 대학교 때 학점을 조금 소홀히 관리했더니 아버지께서 딱 한번 말씀하셨다.  대학교 때 학점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게 지금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내 성적에 대해서 아마도 평생 한 번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아직도 기억나며 나도 정말 잘 관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자랐으면서도 참 내가 아이들에게 숙제하라고 잔소리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한심하다...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실패하고 성장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랑을 빙자한 잔소리로 그것을 박탈하고 있는지 말이다.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든 부분이다.  기다리고 옆에서 아파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힘들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못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역시나 엄마는 이기적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결국 내가 힘들기 싫어서 아이에게 잔소리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넘어져도 아주 큰 사고가 아니면 아이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옆에서 지켜보듯이 한 박자만 늦춰보자.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줄 수 있도록 오늘 한 박자만이라도 멈춰보도록 하자. 나에게 아직은 많은 것을 인내할 참을성의 근력이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이 근력도 노력해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근력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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