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살림 행동
25.06.
우산을 쓰는 이도 있고, 흩날리는 가벼운 빗방울을 맞으면서 걷는 이도 있는 밤이었다. 집 앞 공원을 걸으면서 아스팔트에 나온 지렁이 셋을 풀밭으로 옮겨주었다. 워낙 흙이 있는 구역이 토막 나 있는지라 풀밭으로 보낸 지렁이를 다시 마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챙겨 다니는 손수건으로 지렁이를 덮어 살며시 존재를 확인할 정도로만 잡는다. 그리고는 아스팔트와 그나마 멀리 떨어진 풀밭으로 서둘러 가서 지렁이를 놓아준다.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써 보았지만 손수건을 이용할 때가 가장 안정적이고 지렁이도 저항이 적다. 주위에 떨어진 나뭇잎이나 나뭇가지에 지렁이가 올라타게 하려고 하면 지렁이가 적극적으로 몸을 뒤틀고 움직인다. 그렇게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내가 괜히 개입해 지렁이를 괴롭힌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요즘 보니 오동나무 잎이 사람 얼굴만 하던데, 그런 잎이면 손수건을 대신하는 역할을 할 것 같다. 지렁이가 아스팔트를 건너는 막바지에 이르렀다면 보초를 서듯 그 뒤에 서서 가만히 딴청을 피워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수상한 짓을 하는 것보다 더 뻘쭘했고, 정말 나를 스치듯 피해 가는 사람도 있기에 바로 내 앞의 지렁이가 밟힐 가능성도 있다.
공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원형으로 사람들이 걷고 뛸 수 있는 매끈한 트랙이 있다. 사람 셋이 나란히 걸으면 누군가의 진로를 방해할 정도의 폭이다. 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아 조금 빠르게 걸으려 하면 앞사람을 피해 요리조리 다녀야 한다. 트랙 위에서 꾸물럭거리며 지나가는 지렁이는 아무도 모르게 사람 발에 밟힐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가능성을 더욱 실감한 건 며칠 전이었다. 트랙 위에 있는 지렁이를 발견하고 바로 멈추어 행동하지 않았다. 한 바퀴를 돈 후에도 지렁이가 위태로워 보이면 그때 옮겨줘야지 생각했다. 5분 정도 흘렀을까. 다시 그 자리에 오니 지렁이가 밟힌 채로 죽어있었다. 내 행동을 지연시킨 이유가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스스로 부끄러웠다. 모두가 트랙을 따라 한 방향으로 가는 중에 나 혼자 멈추어 갑자기 쪼그려 앉아 미심쩍은 행동을 하고 있으면 타인들이 나를 의아하게 볼 것 같아서다. 그리고 나도 아스팔트 위의 지렁이를 흙으로 옮겨주는 행위에 대해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누가 묻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이 행위가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몇 주 전 엄마와 같이 밤 산책을 하다가 만난 지렁이를 보며 얘기하다가 엄마는 무심코 말했다. “근데 어차피 또 금방 아스팔트에 나올 거 아냐.” 맞다. 하지만 지나칠 수가 없다. 그대로 두면 곧 죽을 것 같은 생명을 보았고, 지금의 위기 상황을 벗어나도록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니 할 뿐이다. 당장 몇 분 뒤 이 생명이 밟혀 죽거나, 다음날 아스팔트 위에서 햇빛에 말라죽을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죽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든 비인간동물이든 살리는 일은 그 자체로 당위성이 있다. 살리는 일이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지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살리려는 시도는 필요하다.
인천 도담초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활동하는 ‘지렁이 구조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모임이 생명권행동 지원사업으로 당선되었다. 지렁이의 안위에 크게 마음 쓰는 이들이 있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은 응원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반가웠다. 아이들이 등원하는 시간에 요가를 다니다 보니 애가 타는 듯한 보호자 옆에서 아이가 흙과 풀 앞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궁금해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작은 생명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의 모습은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여지고 때론 감동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어른 나이가 되어서도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괜히 스스로 유별나게 느껴지고 위축되기도 한다. 동시에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어른을 보면 굉장히 반갑고 내적 친밀감이 높아진다. 몇 년간 정말 가깝게 지내다가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상황들로 인해 멀어진, 짝사랑한 채로 이별한 듯한 친구가 있었다. 용기 내어 어색하게 인사하는 사이로 지내던 중에 그 친구가 지렁이를 들고 흙으로 옮겨주려 빠르게 걷는 모습을 우연히 마주쳤다. 안도감과 반가움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던 친구는 여전하구나.
비가 오는 날과 그 다음날 밤에 걷다 보면 내게는 안테나가 하나 더 생긴다. 밟힐 위험이 있는 지렁이가 있는지 곧 말라죽을 것 같은 지렁이가 있는지 살피며 자꾸 바닥을 보게 된다. 사위가 어두운 상태에서 나뭇가지나 보도의 갈라진 금은 지렁이로 보이기 십상이라서 멈칫할 때가 많다. 약간은 번거로울지 몰라도 그것이 내 마음이 편한 쪽이기에 계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