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니데이인뉴욕
의식 있는 반항아라니, 요즘 그런 캐릭터를 주변에서 본 적이 별로 없다. 아마도 진지함에 대한 사회적 조롱이 심해졌기 때문일까? 진지함을 병으로 놀려대는 쿨(Cool)함이 지배하는 세계에선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언뜻 멋져 보이는 쿨함이란, 고대 그리스 시대 회의주의적 소피스트들처럼 복잡한 세계에 대한 해석을 시도할 성실함이 부족하거나 인생이 던지는 고난에 순응해버린 나머지 억지로 떠밀려 걷게 된 길을 정답이라 우기는 자세가 아닐까? 란 생각도 든다.
물론 이 풍진 세상에, 허허 웃는 쿨함으로 넘기면 그 역시 괜찮은 인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고래로 쾌락주의자든 금욕주의자든 그 동일한 갈구 대상은 마음의 평온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그들이 평온에 이르기 위해 욕망을 제거한 채 온 생을 다 바쳐 정진했음을 떠올려 본다면, 요즘의 세상 가벼운 쿨함으론 결코 이르지 못할 평온임에는 분명하다.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라는 책에서, 누군가에게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면 그중 자신에게 의무가 되는 괴로운 길이 정답이고, 윤리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 누구도 괴로움을 의무로 지고 싶지 않기에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 자기 합리화를 꾀하기 때문이다. 즉, 쿨함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 그 성찰의 깊이와 관계없이- 진지함과 비교하여 덜 괴롭고, 쉬운 기만적인 삶의 태도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진지함을 삶의 자세로 취하는 데에도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심함과 찌질함이다. 일단 없어 보인다. 진지한 반항아라는 말이 성립하는 지점도 사실은 소심함과 찌질함의 경계다. 인격적 성장을 위해선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신의 내면이란 게 보기 싫은 것 투성이다. 게다가 그것을 극복하려 몸부림치지만, 성장한 인격을 당당히 책임질 마음의 내구성이 약해서 곧바로 찌질해져 버린다. 그래서 진지한 반항아는 쿨하지 못하고 소심하고 찌질하다.
결국 성장하는 인생이 되느냐 마느냐는 쿨함과 진지한 너머, 총체적 유치함과의 한 판 승부인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를 보자. 그는 시험에서 낙제를 하고 학교를 나와 불만에 찬 욕설을 내뱉으며 주변을 떠도는 가출 청소년의 전형이다. 게다가 그의 반항이라는 게 사실, 부잣집 도련님 수준이라 할법한 저항의 경계를 오간다. 실제로 그의 부친은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부잣집 가출 청소년과 다른 점이 있다. 그가 방황하며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결코 순순히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작정 누굴 미워하거나, 껄렁거리고 돌아다니며 멋있고 쿨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반하는 캐릭터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의식적이다. 세상을 보는 비딱한 시선으로 시니컬한 말을 줄곧 내뱉지만, 한편으론 절벽이 있는 호밀밭 경계로 떨어지는 아이들을 지켜주겠다는 순수한 의식이 가슴 한곳에 또렷이 살아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제이 개츠비는 어떨까.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미국의 1900년대 초, 흙수저에서 벗어나 성공한 인물이며 매일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파티를 여는 인물이다. 좋은 집안 배경을 자랑했던 것과 달리 실제론 불법 밀수업으로 돈을 번 인물이고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로 과시적 파티를 즐기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주위에선 파티를 즐기면서도 허영과 위선에 찬 찌질한(Great!) 친구라 수군댄다. 소설의 결말을 보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듯 하지만, 그 쓸쓸한 장례식을 닮은 시대에 어쩌면 오직 개츠비만이 고고하게 빛났던(Great) 인물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연인과의 재회로 표상되는 순수한 삶의 의지 때문이다.
소개할 영화 <레이니데이인 뉴욕>은 소설 속 콜필드와 개츠비를 조합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주인공 개츠비(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이름)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콜필드나 제이 개츠비를 닮았다. 그의 캐릭터를 보면, 잘생긴 부잣집 도련님으로 허울 좋은 명문대에 다니고 있다. 시간 날 때면, 수업 대신 도박판에서 돈을 따는 게 취미다. 영화감독을 취재하게 된 여자 친구를 위해 값비싼 호텔방을 예약하기도 하는데, 여자 친구는 은행가 재벌의 딸로 취재로 만난 영화판 사람들이 모두 눈독을 들일 정도의 미녀다.
반면 개츠비는 찌질하고 소심한 진지충(?)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 교정 잔디밭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부자인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사회적 과시욕이 심한 부모를 경멸한다. 고향인 뉴욕에 들러도 어머니의 파티에는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 노력한다. 허영이 심한 여자 친구가 영화판 사람들과 점점 깊이 얽혀 들어갈 때는, 그녀를 의심하고 뺏길까 안절부절못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우연히 만난 전 연인의 여동생 '챈'은 그런 찌질한 모습에 코웃음을 친다.
개츠비는 콜필드처럼 뉴욕의 거리를 헤맨다. 또한 제이 개츠비처럼 과거의 연인을 그리워한다. 콜필드가 부조리하게 살아가는 거리의 사람들을 만난 것처럼, 개츠비는 형편없는 사고방식을 지녔지만 곧 의사가 될 친구, 예비 형수의 웃음소리 때문에 파혼을 고민 중인 형, 어떻게 하면 여자에게 작업을 걸까를 고심하는 영화계 인사들, 호텔 바에서 몸을 파는 여인, 그리고 과시욕에 물든 어머니를 차례로 만난다. 그는 부조리한 인간들을 보며 환멸을 느낀다. 자신 역시 그들과 다를게 없는 부조리하고 찌질한 인간임에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애꿎은 어머니에게 따져 묻는다.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충격적인 말이 돌아온다. 그 말은 분명 충격적인 것이지만 정직하고 용기 있는 것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어머니는 제이 개츠비였다. 그리고 그 피를 물려받은 개츠비는 당연히 제이 개츠비이자 콜필드로 존재함을 은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비 오는 뉴욕의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콜필드가 비 오는 날 사랑하는 여동생이 회전목마를 타며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에 각성을 하게 되듯, 제이 개츠비가 옛 연인과의 재회를 꿈꾸며 순수함을 지켜냈듯, 그렇게 개츠비 역시 찌질함을 씻어버릴 듯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순수한 사랑과 재회한다.
<레이니데이인 뉴욕>은 운명처럼 주어지는 삶의 조건들에 순응하지 않는 반항아의 덕목에 대해 그린다. 젊은 시절엔 누구나 조금씩은 반항아의 모습을 갖는다. 그 모습은 허영과 위선, 자기기만과 남 탓으로 얼룩진 찌질함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냥 반항아로 타락해가고 또 어느 누군가는 의식적인 반항아가 된다.
그 차이는 의식적이란 단어에 있다. 의식은 무엇에 대한 생각을 뜻한다. 의식은 지향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의식이 무언가에 대한 지향을 갖고 있다는 말은 결국 어떤 대상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등 20세기의 철학은 그래서 의식의 철학인 동시에 관계의 철학이다. 관계를 맺기 위해선 나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하고, 결국 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것에서 의식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라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타인은 물론 스스로와 관계 맺기를 포기한 사람이 돼버린다. 나와 의식적으로 관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화 초반 개츠비의 외면적 태도처럼 삶의 부조리함과도 제대로 관계 맺지 못한다. 원인을 오로지 외부에서만 찾고 자신을 동정한다. 유치함과 찌질함은 싫으니까 이를 감추려 허위와 과시욕으로 살아가게 된다.
반면 그 와중에 나를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용기를 가진 이들은, 똑같이 방황하고 그 찌질함에 견딜 수없이 부끄러워지겠지만 다른 삶의 태도를 갖게 된다. 개츠비가 어머니의 정직한 말에 충격과 수치보단 이해와 공감의 각성을 하게 된 이유도 의식을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인격과 진정한 관계를 구축할 의식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잿빛 뉴욕의 풍경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순수한 사랑과도 관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식 있는 반항아는 젊은 시절의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지만, 사실 우리는 시지프스의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처럼 평생에 걸쳐 운명과 삶에 반항적이어야 하기에 의식적인 자세를 필요로 한다.
카뮈가 말했듯 인생은 부조리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돌처럼 단단하고 무거운 운명에 압살 당하는 존재, 순응하는 둔감한 존재 대신, 계획된 숙명의 프로그램 밖으로 나아가 보려는 의식을 가진 콜필드와 개츠비에 우리는 이끌린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나이와 관계 없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은 의식 있는 반항아의 모습에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