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내가 대학시절을 보낸 90년대는 하루키와 왕가위로 기억된다. 소설가와 영화감독으로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이 둘은 내게는 하나의 단어로 정리된다.
스타일
하루키의 문체나 왕가위의 핸드헬드와 몽환적 미장센은 뻔한 이야기들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뻔한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하는 게 예술의 사명이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이자 형식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90년대에서 2천 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밀레니엄의 거대한 고비를 넘어서는 역사적 동요가 느껴지는 때였다. 걸프전과 코소보 전쟁과 같은 글로벌 소요가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IMF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마음을 다쳤다. 그 와중에 나는 졸업을 해야 했다. 환율 급등으로 돈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갔지만 그 돈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회사는 없었다. 매달 돈이 빠져나가는 거대한 구멍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은 물건 치울 때 쓰는 간단한 단어로 손쉽게 '정리'되었다.
하루키나 왕가위의 작품들은 상처 받고 버려진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를 버텨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언젠가 하루키는 모든 책은 그 책이 읽힐 최적의 시공간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리고 90년대 말이 아마도 그런 시기와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이 제시한 세계를 버티는 방법은 스타일이다.
문체나 작법을 스타일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여기선 <중경삼림>과 <화양연화>의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양조위, 가발을 쓰고 늘 짙은 선글라스를 쓴 임청하의 스타일을 말한다. 하루키의 초기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양을 쫓는 모험>, <노르웨이의 숲>에 나온 주인공 와타나베 역시 스타일로 세계를 버틴다. 언제나 사건과 그것이 일으키는 파장에 가까스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상의 스타일을 지켜간다. 바스 오일로 샤워를 하고 옷을 빳빳하게 다리고 침대보를 정리한 후 담배를 피운다. 하루키 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를 하지만 이처럼 주인공의 스타일은 고정되어 있다.
우리가 세계를 맞서는 방법은 늘 교묘한 기획이나 감당 못할 용기가 권장되어 왔다. 거짓말. 도리어 우리를 지켜주는 건 단단한 권태로움이다. 한때는 지겨워 숨 막힐 것 같은 반복되는 하루, 그 안에서 어시장의 비린내처럼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채 몸에 배어버린 타성에 젖은 습관들이 이번에는 세계를 버텨내는 지지대가 되어준다. 우리가 세기말에서조차 죽음의 형태를 쉽사리 떠올리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삶의 타성이라 부르는 견고한 성벽이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세기말인 1999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가 등장하고, 그 여자는 '뮤'라는 여성을 만나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게 된다. 하루키의 스토리텔링이 그러하듯 이야기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그리고 그 양쪽 세계 한가운데 걸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있다. 지구와 우주, 그리고 지구와 우주의 어디쯤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궤도를 따라 도는 스푸트니크호. 우리는 스푸트니크호에 올라탄 실험용 강아지 라이카와 같다.
좁은 인공위성 실내에 어느 순간 존재하게 된 상황은 내 의지도 아니고, 무엇보다 멈추거나 조종할 수 있는 것도 못된다. 스푸트니크호가 우주와 지구의 경계에서 적당한 중력에 의해 포착된 운명의 비유라면 실존적 인간상의 비유인 라이카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주인공이 그러했듯 스푸트니크호에 남아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거나, 스미레처럼 잠시 사라져 우주를 유영하다 돌아오는 일 정도가 아닐까?
인생은 무언가를 구축하고 쌓고 만들어 오는 미션으로 존재하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쉽게 저지르는 오해다. 인생은 일단 올라탄 운명의 궤도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까에 대한 물음이다.
수염의 길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깔끔한 면도, 주머니를 빼서 다려주는 세세한 다림질, 어떤 순간에도 정장의 주름이 살아있고 반지르한 포마드 기름이 흐르는 헤어가 어처구니없게도 너를 지켜주리라는 것. 이러한 타성의 관습적 리듬감이 존재의 위기를 모면하게 해 주리란 것. 그들의 작품은세기말 비오는 골목 구석에 버려진 사람들을 향해 입을 모아 말한다.
<아비정전> 장국영의 맘보처럼, <댄스댄스댄스>속 양 사나이의 춤처럼
스푸트니크호가 멈추는 순간까지 리듬을 찾아.
그 리듬과 스타일이 세계를 구원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