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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Sep 08. 2021

9. 세계 너머를 보는 방법이 있을까?

불변의 길_파르메니데스


[숲 속에서 만난 여신]


밤에 숲 속에 혼자 남겨진 동하는 부스럭대는 소리에 몸을 낮췄어요. 어둠 속에서 마인크래프트에서 본 것 같은 푸르스름한 좀비들이 움직이고 있었어요. "크르르... 으르릉"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먹잇감을 찾듯이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죠. 동하는 이 숲을 일단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어요. 고개를 돌리는 동하에게 깔린 좀비가 버둥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크오오오오!" 순간, 주변에 있던 좀비들이 사진처럼 멈춰 서는가 싶더니 갑자기 동하 쪽을 바라봤어요. 엄청난 속도로 동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어요. 동하는 비판의 검을 뽑아 들고 좀비들과 싸우기 시작했어요.


비판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좀비들은 원을 그리며 나가떨어졌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어요. 열명, 아니 스무 명, 아마도 백 명은 됐던 것 같아요. 동하는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지만 금세 지치고 말았어요. 탈레스 님이 주신 물항아리로 탈출하고 싶었지만 잠깐이라도 멈췄다간 백 명이 넘는 좀비 떼가 동하를 덮쳐버릴 듯했어요. "아... 여기가 끝인가! 하나를 구출해야 하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게다가 좀비들에게 물리면 엄마 아빠 품과 아늑한 내 방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말겠지?" 동하의 눈에 눈물이 고였어요. 숨을 몰아쉬며 지쳐서 그만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어요.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밝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달빛이 아니었어요.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무릎까지 내려온 아름다운 여신이 커다란 바위에 서 있었어요. 그 여신님은 하늘하늘 거리는 선녀님 같은 옷을 입고 동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아름다웠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동하의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어요. 그리고는 갑자기 동하의 비판의 검을 향해 손을 뻗었어요. 여신은 검을 움켜쥐고는 온 숲 속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세계는 허상이다...
너희들의 집, 아무것도 없는 길로 돌아가라!


검의 중심부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빛이 좀비들 몸에 닿자, 좀비들은 마치 눈이 녹아버리듯 흐물거리더니 땅바닥으로 스며들어 없어졌어요. 순식간에 숲 속에는 평화가 찾아왔죠.


"길을 잃은 어린 철학자여..." 여신은 바위에서 내려와 동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어요. 동하는 눈물이 번진 얼굴로 여신을 바라보며 대답했어요. "하나를 구해야 해요... 레벨업을 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흑흑흑. 그런데 MSG가 쫓아오고, 제 친구 하나는 미토스가 데려가고, 숲에선 좀비가 나타나고... 너무 무서워요." 여신은 동하를 엄마처럼 꼭 안아줬어요.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리의 길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파르메니데스와 불변의 길]


여신 : 그대는 방금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났지요? 모든 것은 서로 싸우며, 그 싸움으로 인해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꽃처럼 움직이는 것이 세상의 원리라고 배웠지요?

동하 : 네. 밤과 낮, 여름과 겨울, 미토스와 로고스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싸워가며 세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움직인다고 배웠어요. 또 그런 싸움을 통해 어쩌면 세상이 더 조화롭게 되거나, 더 나은 진리를 알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했어요.  

여신 : 똑똑한 어린 철학자여.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를 배웠다면 변증법에 따라 이제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배울 차례로군요.  

동하 : 모든 것이 변화하고 흐른다에 반대라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여신 : 맞아요. 내게 찾아온 파르메니데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깨달은 이야기랍니다. 아까 내가 외친 주문을 들었지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동하 : 죄송한데요... 멋지긴 한데 말장난 같아요. 있는 건 당연히 있고, 없는 건 없지요.

여신 : 맞아요. 그런데 잘 생각해봐요. 있는 것은 처음부터 있었어야 해요. 그런데 있는 것이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질 수 있나요? 반대로 없는 것은 처음부터 없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갑자기 뾰로롱 하고 뭔가가 생겨날 수 있나요?

동하 : 그... 그건... 아니죠. 그런데 있던 게 없어지고 없던 게 생겨나야 변화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여신님 말씀대로라면 아마도 변화란 건 없는 것 같아요... 잠깐, 근데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계절의 변화는 분명 있는데... 이상해요. 이해가 안 돼요.  

여신 : 맞아요. 계절의 변화는 있는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계절의 변화라는 현상 뒤에 있는 본질은 변하지 않아요. 처음 들을 땐 이상한 이야기 같지요. 그런데 나와 파르메니데스는 이 이상한 생각으로, 이곳 세상이 게임으로 만들어진 가짜 세상이라는 걸 알아냈어요.

동하 : 네? 정말요? 여신님과 파르메니데스 님은 게임 세상에서 태어나 살았으면서 어떻게 이곳의 좀비가 게임 캐릭터일 뿐이고 또 이 세상이 게임 속 가짜 세상이란 걸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저야 진짜 세상에서 왔으니깐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말이에요.

여신 : 우리가 세상을 파악할 때는 눈, 코, 입을 사용해요. 이 세상의 진짜 모습이나 진리를 찾을 때도 탈레스처럼 물도 손으로 만져보고, 헤라클레이토스처럼 불꽃도 눈으로 관찰하지요. 그런데 이건 속아 넘어가기 쉬워요. 꽃 향기를 가짜 꽃에 뿌리고 동하 앞에 가져다 대면 동하는 그걸 진짜 꽃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감각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해요. 꽃의 모습과 향기라는 현상에 속으면 진짜 세계를 볼 수 없답니다.

동하 : 그러니까 우리가 아예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세상 너머의 진실을 보려면 눈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봐야 되는 거군요.  

여신 : 정답! 파르메니데스는 이전의 철학자들과 다르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원리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대신에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것들을 알아챌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줬어요. 바로 오로지 논리와 순수한 생각.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변화란 없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형체(形) 너머(而上)의 진리를 알아내는 학문(學)을 만들었어요. 그게 바로 형이상학(形而上學)이에요.   



[철학자의 지도]


말을 끝마친 여신은 동하에게 비판의 검을 돌려주며 말했어요. "어린 철학자여, 숲에서 길을 잃고, 이 세상에서 길을 잃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동하가 말했어요. "여신님, 지금까지 이 게임 세상에 와서 훌륭한 철학자들께 배우고 많은 지혜를 얻었지만 여전히 어떤 길로 가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흑흑"


여신님은 손을 한번 휘두르자 숲이 금세 대낮처럼 환해졌어요.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잘 생각해보면 길은 언제나 찾을 수 있답니다." 여신님은 품에서 작은 지도를 하나 동하에게 줬어요. "이 지도는 철학자의 지도입니다.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죠. 여기에 그려진 길들을 잘 살펴보고 하나를 찾아야 해요. 하나를 찾으려면 누굴 찾아가야 할지 생각해봐요." 말을 마친 여신님은 햇살처럼 강한 빛을 내며 하늘 위로 사라졌어요.


동하는 지도를 펼쳤어요.

  

동하가 여신님께 받은 지도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


1. 파르메니데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말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엘레아(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학파의 철학자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달리 세상은 불변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생각은 제자인 데모크리토스에게 이르러 '세상은 원자로 되어있다.'라는, 우리가 현재 과학에서 배우는 생각까지 나아갑니다.  

2. 형이상학 : 파르메니데스는 경험이나 감각이 아니라 순수한 논리와 생각의 힘만으로 세상 너머의 진리와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즉 세상의 뒤편에 숨겨진 정체와 원리를 순수한 생각과 이성으로 탐구하는 학문인 형이상학의 근거를 마련한 철학자입니다.

3. 여신과 파르메니데스 :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주장을 시로 만들었어요. 그 시에는 여신이 등장해서 파르메니데스에게 진리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이야기로 되어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로고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여신이 등장하는 미토스적인 이야기로 자신의 주장을 쉽게 이해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비유나 이야기 방식은 지금도 많이 사용하는 논술의 기본방법입니다.

4. 철학의 큰 두 가지 흐름 :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모두 세상의 근본 법칙을 설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실제 눈에 보이는 세상을 대상으로 변화의 원리를 중요시했다면, 파르메니데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와 이성(생각)이 최고란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이 두 사람의 생각은 이후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며 지금까지도 철학이 싸우며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도록 했답니다.   


[엄마 아빠를 위한 팁]


파르메니데스는 동하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시로 남긴 데다가 자료도 중간중간 사라져 버려서 정확히 해석하기 어려운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철학자로 반드시 언급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진리와 원리 세계 너머에 숨어있다면, 그 세계 너머를 보기 위해서, 또 알기 해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문법과 사고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그 생각의 방법을 보여준 철학자라는 점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상상력이 풍부합니다. '여기까지가 확실한 세계야! 더는 없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산타클로스도 믿고 귀신도 믿고 네버랜드도 믿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아이들은 어른과 달리 생각의 지평이 열려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작은 철학자인 아이들이 던지는 아주 엉뚱한 질문이나 생각들을 어른의 생각으로 제한하지 마세요. 뭔가를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며 아이를 좁은 세계로 몰아넣지 말아야 합니다.


아이의 생각을 응원해주고 엉뚱한 질문에도 관심을 가지고 질문 이어가기를 해보세요. 상상력의 세계가 보존된 아이는 더 넓고 큰 세계를 살아가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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