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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Aug 24. 2024

중산층과 직업의 관계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요즘, 버티기에 들어간 중년 노동자가 많아졌다는 기사를 읽었다. 과거엔 40대에서 50대 초반에 자의든 타의든 은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인플레이션과 인구 감소, 경기침체, 그로 인한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장 제도가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엄습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더럽고 치사해도 직장에서 버티는 길을 선택했다.



그간 열심히 일하고 세금도 꼬박꼬박 내며 사회 구성원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이제 여유 있는 쉼이 주어져야 마땅다. 그런데 프랑스에선 62세에서 64세로 정년을 연장하는 연금 개혁에 반발해 과격한 시위가 일어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도리어 정년 연장을 무슨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느끼는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물론 나라마다 사정이 다르니 사회보장제도나 국부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산층으로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교육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OECD기준으로 우리나라 경제적 중산층은 61%로 여타 선진국과 큰 차이가 없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의료보험 혜택도 수위에 속할만큼 잘돼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으로 의심해 볼 것은 중산층 개념의 문제가 아닐까?


프랑스의 조르주 퐁피두 전 대통령이 제시한 중산층의 기준은 외국어와 세계경험,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와 악기 등 예체능 능력, 우리 집만의 별미 만들기 등이었다. 영국과 미국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 정기적인 책 구독여부 등이 중산층의 기준이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와 중형차, 통장잔고 1억 이상과 일 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경제력을 중산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중산층 기준이 오직 돈이라면, 서구 선진국가들은 넓은 의미의 취향임을 알 수 있다. 이즈음 자기 취향을 갖는 게 대체 중산층과 무슨 상관인지 의아할 수 있다.


칸트에 의하면 취향은 테이스트(taste)이다. 즉 나만의 주관적 만족감이다. 미학에서의 취미판단이란 누구에겐 물냉면이 좋을 수도 있고 누구는 싫을 수 있다는 것. 누구는 새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고 다른 이는 징그럽다고 할 수 있다는 것. 즉 좋고 싫음의 기준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된다란 생각이다.


따라서 서구에서의 중산층은 '아파트는 있어야 중산층이지, 1억은 있어야 결혼을 하지.'를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주관적 관점을 가질 수 있는 취향의 보유여부, 즉 나는 나에 대해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가, 그럴 능력과 여유가 있는가가 기준이 된다. 그래야 삶을 나답게, 다채롭게 살아갈수 있단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결국 저런 취향도 교육 여건이 되고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렇다. 외국어를 배우거나 세계경험을 하거나 수영과 테니스, 피아노를 배우는 것, 정기적으로 비평지를 구독하는 것, 약자를 돕고 보살피는 것도 모두 돈이 있어야 하고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선결조건으로서 돈을 먼저 앞세운 것이다.


"그럼에도 왜 굳이 돈이 아니라 취향을 앞세운 것일까?"


서구 사회에선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많은 인구가 유입이 됐다.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에 묘사된 대로 다섯살난 아이들을 굴뚝청소에 밀어넣는 식의 아동 착취가 만연했고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에 투입됐다.


근대에는 그렇게 인간=노동력->부(富) 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근대 연구에 따르면, 인간을 노동력의 수단으로 보면서 학교는 쓸만한 노동력을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바뀌었고,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배제돼 정신병원에 수용됐으며(광기의 역사), 범법자들은 노동력이 있기에 노동교화형으로 처벌방식이 바뀌었다.(감시와 처벌)


그러나 인간은 부를 만들어내는 노동기계가 아니란 깨달음이 움텄다. 산업혁명과 빅토리아 시대를 거치며 최소한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은 주말에 PUB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문화를 즐기기 시작했다. 가장 끔찍했던 노동 현장인 영국에서 문화연구가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문화의식과 취향이 그 뒤를 이어 발달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역사의 흐름이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기준으로도 밀리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당연히 노동=돈의 시대를 넘어 '취향'과 문화의 단계로 넘어가야 함에도 여전히 200년 전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관에 머물고 있다.


문화소비를 한다해도 브랜드를 줄세운다. 내가 즐기는 문화가 아니라 계급에 맞는 문화를 찾아 몰개성한 소비를 한다.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산다.


특히 전후 압축 고도성장을 경험한 우리나라의 부모 세대는 산업혁명과 빅토리아 시대를 방불케 한 시간을 살아냈다. 그분들은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냈음에도 은퇴 후에 공원 근처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여생을 보낸다.


그 이유는 돈을 버는 기능 외에 자신의 삶을 관조하고 즐길 '문화 자본'을 얻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를 소비한다해도 남의 기준에 맞춰왔기에 온전한 내것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읊조린다.


막상 퇴사를 하니 좋았던 것도 별로야...


과연 그 좋았던 것은 내가 좋아했던 것일까?

노동의 기능과 사회적 명함을 제거한 순간, 사회에서 나란 존재는 사라져 버림을 경험한다. 


국경 없는 IT 시대, 나만의 취향에 기반한 문화자본은 경제자본으로 교환 가능하다. 독특한 관점으로 자신이 일해왔던 분야에 대해 비평하는 유튜브를 할 수도 있고, 취향에 맞는 블로그를 운영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도 가능하다. 돈을 벌지 않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은퇴 후 생활을 누리며 즐길 수 있다.



결국 앞서 말한 다른 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노동 이후, 더 넓은 세계를 조망하고 삶을 누릴 수 있는 깨달음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가깝다.

노동자로서의 삶 외에 '나로 사는 법'을 아는 여유를 갖췄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직업의 효용도 두 개의 층위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노동자로서 경제 자본을 획득하게 해주는 기능이다. 막 사회에 나온 시점에 부모님이 아프실 수도 있고, 결혼 등 사회적 경제적 독립에도 돈이 필요하다. 일단 돈을 열심히 벌고 저축하고 투자하면서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두 번째 층위가 있다. 취향을 개발하여 중산층 진입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문화 자본을 획득케 하는 기능이다.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직업 세계를 경험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나의 '취향'을 찾아야 된다. 해외 출장의 경험, 무례하거나 이상한 사람과의 만남, 리더로서의 역할 등... 방구석에만 있다면 알 수 없었을 다채로운 경험 속에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밝혀나가고 정립하는 기능이다.  


오늘의 경험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사랑하는 오늘인가


대개의 직장인은 로또에 당첨돼 당장 지금의 지긋지긋한 일을 때려치우기를 꿈꾼다. 공포스러운 불확실한 미래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취향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로또와 자유가 가져다준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단 점이다.


아마도 더 놀라운 지점은 그들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기에 로또 없이도 이미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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