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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Sep 07. 2024

일과 직업의 본질은 무엇일까

일하는 당신이 자랑스럽다

이하 코파일럿

고객이 왕인데 감사한 이유


남의 돈 벌기 쉬워?


전에는 이 무례한 멘트가 흔한 말이었다. '고객은 왕이다.'는 또 어떻고. 내가 힘들게 번 돈을 내주는 이니,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가지고 나올 때도 우리는 말한다.

고맙습니다!

뭔가 이상하다. 돈을 번 건 편의점 사장인데, 나는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걸까? 친절과 서비스는 돈 버는 사람들의 당연한 의무일 텐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만년 전, 인류기원으로까지 거슬러가야 한다.


초기 문명의 사람들은 사자를 물리치고 매머드를 사냥할 때, 혼자보다 여럿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원시 공동체를 이뤄 모여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은 사회 안에서도 누군가가 특별하게 잘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날쌘돌이는 운동신경이 좋아 사냥을 잘한다. 토닥토닥씨는 세심하게 아이를 잘 돌보고, 뚝딱씨는 집을 잘 짓고 도구를 척척 만든다. 멀리봐씨는 날씨를 기막히게 잘 맞힌다.


사냥을 나갈 땐 멀리봐가 날씨를 예측해 준다. 집을 지어줄 땐 토닥이가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돌봐준다. 그 대가로 날쌘돌이는 고기를 나눠주고, 뚝딱이는 집과 도구를 공급해 준다.



현대 사회에서도 노동의 교환이란 원시적 기본 원리는 달라진  없다. 사장님이 내 돈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돈으로 표현되는 내 노동과 편의점 사장님의 노동을 교환한 것이다. 게다가 내가 매머드를 사냥할 동안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 있어 고마운 것처럼, 집 앞에 편의점이 있기에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고기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누군가가 바꿔주지 않으면 헛수고일 테니 기꺼이 노동교환에 응해준 분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렇게 보면 돈이 누구 주머니로 들어가고 누가 왕이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서로의 노동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이 보람없고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이유


그렇게 따지고 보면, 지금 지겨워하며 하는 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고 필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일터에서 이렇게 읊조릴 때가 많다.


 보람도 없고 무가치하다. 대체 이딴 일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우리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주장해도, 직장인은 대부분 보람도 없고 무익하다고 느낀다. 이유가 뭘까?


신화에 오염된 일


첫째로는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상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기 위해선 생산자 계급, 수호자 계급, 통치자 계급, 즉 노동의 계급화가 필요하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다. 이 중에서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계급은 생산자이고, 이들은 사회기반을 지탱해야 하기에 일 자체가 고될 수밖에 없다.


모두 잠든 새벽에 일어나 농사를 짓거나 매캐한 연기를 마시며 대장간에서 야삽을 만들어야 고, 차가운 시장바닥에 앉아 하루종일 물건을 팔아야 한다. 애초에 사회가 굴러가는데 필요한 일들은 모두 꺼려하는 일인 데다가 딱히 누릴 명예와 권력도 따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Q방법론을 만든 윌리엄 스티븐슨 같은 학자는 일과 놀이를 고통의 존재 유무로 규정하기도 했다. 일의 본질은 고통이란 것이다. 그런데 일이 고통스러워도 보람과 가치는 느낄 수 있으니 플라톤의 말을 더 들여다보자.  


자기 일에 불만인 사람은 다른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어 한다. 이때 플라톤은 신화 체계를 발명해 계급을 고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화? 지금 세상에 그런 어설픈 이야기넘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가짜 노동>이란 책에선 산업혁명 시대 이후 지속되어 온 미친듯한 노동 집중의 이유를 파헤친다. 그리고 중세로부터 이어진 기독교 윤리가 인간 노동에 신화처럼 깃들여 있음을 발견한다. 인간=노동, 근면과 성실함으로 고행하듯 일하는 게 바람직한 삶의 태도란 가치관이 그것이다. 이런 근면 성실이야 말로 인간이 걸어야 할 마땅하고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사람 구실하려면 자고로 열심히 일해야지.', '눕는 건 관짝에 들어가면 실컷 할 수 있어.' 이런 말들은 우리도 흔히 들으며 자란 일과 직업의 도덕률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고통스러운 일인데, 가치나 취향을 따질 겨를도 없이 학교를 졸업하면 홀린 듯 직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매일 8시간 이상 자리를 지키며 일에 몰입한다. 신화가 여전히 작동되는 것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덕분에 일의 가치와 보람에 대해 생각하고 도전할 기회는 포말처럼 사라졌다. 노동 생산성도 떨어진다. 회사엔 '열심'이란 태도만 남은 사람들이 좀비처럼 우글댄다. 신화에 얽매인 가짜 노동인 탓에 보람을 느끼기도 어려우며, 그런 노동은 일하는 우리를 더 무기력하게 만든다.    


일의 보람에서 소외된 직장인


둘째는 마르크스의 노동소외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내가 구두공이라면 열흘동안 뚝딱거려 만들어진 구두를 보며 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내가 만든 신을 신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행복해.' 이런 뿌듯함이 들었다.


그런데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해 철저히 분업화된 공정이 시작됐다. 깔창 만드는 사람, 신발끈 만드는 사람, 고무 생산하는 사람, 생산량을 입력하는 사람 등등. 하루종일 밑창에 본드만 바르던 일꾼이 완성된 구두를 보며 내가 만들었다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인사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뽑은 사람이 사회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는데 데 보람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채용 역시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다. 인사공고 포스터만 게시하거나 지원서류를 분류해 엑셀표에 입력하던 사람이 '훌륭한 인재를 뽑는 일'이라는 가치에 보람을 느끼긴 어렵다. 생산효율만 강조한 현대의 일터는 이렇게 일의 보람으로부터 사람을 소외시킨다.


지루함속에 탄생한 엉뚱한 몰입


셋째는 실제로 쓸모없는 세밀한 일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전에 누군가의 책상에 색채도감이 놓여 있어서 물었더니 보고서를 작성할 때 눈에 띄는 그래프 색채를 지정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이게 의미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보고서의 가독성을 높여 의미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면 견디기 힘들어진다.


'신은 디테일에 숨어있다.'란 격언을 떠받들며 디테일에 몰입하다가 큰 숲을 놓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 디테일이 곧 능력으로 숭상받는 사회에서 직장인은 쉴 틈이 없다. 점점 더 끝도 없는 완성을 지향하는 통에 일의 보람과 가치는 멀어지다 못해, 대체 뭘 하고 있지란 의문으로 끝을 맺는다.


여유가 생기면 디테일을 높이는 대신 쉬는 게 맞다. 그런데 왜 대개는 쓸모없는 일에 몰입할까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과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면서 사람들은 풍요로운 휴식이 공존하는 삶을 꿈꿨다. 경제학자 케인즈조차 하루 4시간 노동의 삶이 도래할 것을 예측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경제가 발전한 OECD국가의 근로자도 여전히 과도한 노동시간에 시달린다. 지금 추세라면 AI가 대부분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미래가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계나 AI가 부가가치를 생산해 줘서 시간이 남으면, 여가를 즐기는 게 맞다. 그러나 마치 한가함을 못 참겠다는 듯 일의 정밀함을 높여가는 인간을 보면, 그저 지루함을 못 견뎌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루함이 문명을 고도화시키는 숨은 동력원인 걸까?   


실제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지루함의 형식을 분류하며 인간을 근원적 지루함에 시달리는 존재로 봤다.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선 몰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몰입의 대상이 내가 보람되다고 느끼거나, 가치 있는 일이 아닐 때 문제가 된다. 그래프 색깔을 고르는 따위의 세밀하고 엉뚱한 몰입은 그런 이유로 등장한다.


가짜노동으로 부품화된 채 디테일에 몰입하여 만들어진 첨단의 인류 문명이란, 남아도는 한가함의 잘못된 부산물에 가깝다. 거대한 마천루에서 무의미한 몰입을 하는 직장인의 무가치하고 보람 없는 노동은 그렇게 탄생한다.


'진짜 일'을 찾아서


'무조건 열심히'란 신화, 노동에서 소외된 시스템, 엉뚱한 디테일에 몰입하는 사회는 '진짜 일'의 적이다. 직장인이 일의 소중한 가치를 잃고 일터를 싫어하게 된 원인이다. 이런 상황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수고한 일에 대한 경외감을 앗아간다. 고마움 대신 돈을 쓰면 얻을 수 있는 소비의 대상으로만 노동자와 직업을 바라보게 만든다.  


구원은 있을까?

카뮈는 매일 출근과 업무에 시달리는 존재로서,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의 비유를 들었다.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을 보며 좌절하는 대신, 시지프스가 언덕을 터덜터덜 내려가며 의식적으로 살아가려 다짐하는 시지프스의 모습에 구원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렇다. 의식적으로 깨어 있는 삶에 구원이 있다.


오염된 신화, 일의 보람에서 소외된 시스템, 쉼 대신 엉뚱한 디테일에 몰입하는 일터의 현재를 더 낫게 개선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일터의 불합리함이 개선되도록 함께 돕고, 휴가는 물론 육아휴직조차 눈치를 보는 상황, 쉼을 죄악시하고 열심만 남아버린 노동의 신화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서로를 깨워야 한다.


왜곡된 일터, 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생산성을 악화시킴은 물론, 사회전체의 활력을 앗아가고 우리 젊은이들을 함께 살아가는 사회란 거대한 대양에 뛰어들길 주저하게 만듦을 깨달아야 한다.  


일하는 당신이 구해낸 사회


일은 확실히 고통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일과 직업은 나를 알게 하고 타인에게 배우며 인생의 소중한 경험을 완성케 해 준다.


일의 본질은 우리가 서로의 노동에 빚지고 갚으며 살아가고 있음이다. 일과 일터에 대한 긍정이 담긴 사회는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당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세상이기도 하다.


무가치한 일이라고 느낄지언정, 오늘 사랑하는 존재와 가족을 위해 일한 당신은 세상을 조금은 좋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부해도 좋다.


당신이 있었기에 우리의 노동을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며 서로의 일에 감사해하는 사회는 결코 밑바닥까지 나빠질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건네보자.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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