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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Sep 14. 2024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법

일터에서의 꿈과 희망의 의미

나이를 먹을수록 조언을 아껴야지 싶다. 딴에는 정성스럽게 접어 건네지만 언제든 횡단보도 앞에 뿌려지는 전단지가 될 수 . 앞에선 전단지를 받고 뒤돌아서서 휴지통을 찾는 상황을 상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특히 유명 교수와 평론가가 각각 나와 일에 대해 조언을 건네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그런 결심을 굳혔다.  


이하 코파일럿 그림


욕먹을까 싶었는지 서두는 장황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단순했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흐릅니다. 후회하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세요!  


진심을 비꼬아서 받아들이고 싶진 않다. 나름 자기 영역에서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결정과 용기를 내야 할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망설임과 고난 끝에 성공했으니 '여러분도 할 수 있을 것이다!'란 격려의 조언일 것이다.


그런데 의도와 달리 이 말은 상처를 준다. 인생이 짧은 것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도 맞다. 그런데 사람들이 꿈꾸는 일이란 명예, 권력, 돈이 뒷짐 진 등에 살포시 숨겨 있다. 즉 꿈이라고 눙치지만 실제로 모두가 바라는 일이란 소수 직업군뿐이다.


공장 근로자나 회사원이 아니라 대학 교수나 유명 평론가가 꿈에 대한 조언을 자신 있게 하는 영상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명예, 권력, 돈 3종 세트를 보유한 자신의 현재가 만족스러운 나머지 '너도 노오력 하면 나처럼 돼!'라면서 조언할 용기가 생겨 버린 걸까?



꿈이 아닌, 돈을 버는 평범한 일터는 사회적으로 필요하지만 고된 일이기에 존재한다. 그런데 모두가 꿈을 좇아 떠나버리면 '소는 누가 키울까?'


밤새 편의점에서 근무할 사람, 더운 날씨에 도로포장을 할 사람, 주말에 잠든 가족을 지켜보다 훈련지로 떠나는 직업 군인이 없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까? 교수나 평론가는 사라져도 당장 문제가 되지 않지만 평범한 이들의 노동 없이는 사회 존립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다짐과 다르게 그분들을 시기하며 비꼬은 것 같아 미안하다. 이래서 조언은 하면 안 된다니까...라는 말도 쓰고 보니 비난이 돼버리고 만다. 조언이란 이래저래 곤란한 것 투성이라니까.


어쨌거나 다들 꼭 필요한 일터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일하고 있는 것에 찬사를 먼저 보낸다. 그런데 말입니다. 꿈을 잊고 열심히 남은 삶, 가족을 위해 나를 포기해 버린 인생은 정말로 괜찮은 걸까?  


'부자가 되거나 가족을 다 건사할 때까지 평생 천직이네 생각하며 버텨야 하나?'


이런 삶은 고통스러워 개인적으로 문제고, 내가 고통스러우니 '모두 괴롭자'란 '고통평등주의'가 세상을 더 고통스럽게 하니 사회적으로도 문제다.


지금도 근로자가 근무시간, 월급 등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보장된 헌법상 권리를 행사할 때조차, '1억 연봉', '귀족노조' 등 언론의 판에 박힌 전략이 여전히 효능을 발휘한다. 나보다 더 받아, 덜 괴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시기심은 쉽게 자극된다. 노동자가 노동자의 적이 되는 것이다.


질투가 아니라 노동자의 욕심이 '기업 생존과 경제'를 망가뜨릴까 걱정돼서란 설명도 이상하다. 더 싸게 오랜 시간 일 시키며, 돈 되는 사업은 물적분할로 주주 이익을 손상시키고, 다양하게 사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경영진의 욕심보다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의 욕심이 경제에 더 치명적이라는 건 대체 어떤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주장일까? 10% P 인상을 하든 월급을 자진 반납하든 그 기업의 생존을 가장 걱정하는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적절한 합의점을 찾는 게 한국 경제를 위한 길이고 헌법 정신일 텐데 말이다.



이처럼 고통은 부정적 심리에 쉽게 휘둘리게 만든다. 타인을 근거 없이 시기하는 등 우리의 인지공감능력을 손상시킨다.


아침마다 휴대폰 알람을 누르고 출근을 반복하는  확실히 고통이다. 카프카의 '소송'에서 수감 이유도 모른 채 감옥에 갇힌 것과 닮았다. 소설의 주인공 K처럼 '개 같군!'이라는 말과 함께 끝없는 고통 대신 죽음을 끌어안는 미래뿐인 직장인은 처연하다.  


그렇다면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얼까?


나치수용소를 경험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고통이란 조건을 큰 문제로 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고통 자체는 절대적 절망에 이르게 할 만큼 힘이 세지 않았다. 다만 고통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죽음에 이른다고 말한다. 소설 K의 죽음을 끌어안을 정도의 절망감도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통은 삶의 구성요소이며 쉽게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있는 것은 의미의 부여다.


이때, 꿈, 희망은 '의미가 부여된 미래'의 다른 말이 된다.


지금의 좁은 집, 낡은 차, 인간관계의 고통은 꿈을 갖는 순간, 미래에 부여된 의미로 재해석된다.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 계기, 꿈이란 열정을 타오르게 한 불쏘시개가 된다. '하고 싶은 일'이란 꿈도 명예, 돈, 권력의 3박자가 갖춰진 소수의 직업군에서 벗어나게 된다. 꿈은 남들이 보기에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란 모습을 찾기 때문이다.


현재 일터, 일의 고통에 숨긴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찾아보는 것. 의미가 부여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 그렇게 찾아낸 오직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뎌 보는 것. 그것이 앞서 말한 분들이 시간에 쫓겨 다하지 못한 조언의 진짜 의미 아닐까.



인생은 짧고 시간은 흐릅니다. 후회하기 전에 내게 의미 있는 일을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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