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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Sep 22. 2024

AI시대, 일의 의미를 찾아서

일의 이름은

AI시대의 러다이트


산업혁명 이후, 방직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은 많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했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고 노동권을 지키는 조합활동의 방식으로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AI 시대를 눈앞에 둔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작년, 미국 배우조합 SAG-AFTRA은 148일에 가까운 파업을 벌였는데, AI가 작품을 쓰고, 스타나 엑스트라의 얼굴을 그대로 베낀 '디지털 트윈'이 배우의 직업을 빼앗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구 사항을 들여다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다. 직업이 사라지는 게 문제라면, AI 영화 제작을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협상해야 할 텐데, 실상은 AI 기술 활용 시 초상, 음성 등 인접권리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주요 조건으로 내걸었다.


어찌 보면 윈윈이다. 배우는 일하지 않고 돈을 버니 좋고, 영화사는 까탈스러운 인간을 대상으로 캐스팅과 연출, 재촬영이란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협상은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스튜디오가 배우의 데이터 셋을 합법적으로 거래할 길을 열어준 기념비적 파업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AI시대의 러다이트 덕분에 일하던 회사에서 이런 제안을 받는다면 당신은 어떨까?


AI가 오늘부터 당신의 노동을 대체하여 부가가치를 생산할 예정입니다. 당신은 사규상 은퇴 시점인 60세까지 지금 받는 수준의 급여를 'AI에게 직업을 제공한 대가'로 받게 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지긋지긋한 노동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나부터도 메일을 받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기뻐하며 떠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는?


일이 없는 인간의 미래


'AI에게 직업을 제공한 대가'는 기본 소득과 닮아 있다. 기본 소득 반대론의 걱정거리인 재원 문제를 AI가 해결해 준 상태라면, 남는 것은 인간에게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유사 이래로 일은 먹고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과 노동의 관계가 너무 유착된 나머지, 노동을 도덕적으로 신성시하는가 하면 일을 통한 자아실현, 정체성 확립, 성취와 발전 같은 빛나는 미사여구를 주렁주렁 매달게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도덕적 가치가 퇴색된 채 끝을 모르는 탐욕적 '기호'소비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일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마도 과거의 자본주의적 관습처럼 명품을 사고 비싼 차 같은 기호를 소비할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연금 복권에 당첨되어 언제든 살 수 있는 기호품이라면 욕구는 금세 사그라들고 말 것이다. 그다음 사람들은 영화 <월E>의 미래 지구인들처럼 소파에 앉아, 안전한 가상 세계 속 재미를 찾아 떠날지 모르겠다.


돈을 잃을 걱정도 없고, 줄 없이 번지 점프를 뛰거나 범죄를 저질러도 체포되지 않는 안전한 세계에서의 놀이를 즐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뇌는 점점 도파민에 절여진다. 행복한 백수도 하루 이틀이지 이내 권태가 찾아온다. 더 큰 자극을 원한다. 성취욕, 명예, 남과 다르게 대접받고 싶은 계급적 욕망이 피어오른다.


이즈음 아이러니하게도 리얼한 위험과 고통만이 쾌감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위한 가상세계를 만들면서 푸념하는 장면이 나온다. 완벽한 가상 세계 속 인간은 모조리 죽어버리고,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세계 속 인간만이 건강하게 잘 살더란 이야기다. 다소 황당해 보이는 말이지만 이 아이디어는 천재 철학자 라이프니츠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악이 공존하는 현실은, 신이 만들어낸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논증을 펼쳤다. <매트릭스>의 기계가 고통스러운 가상세계의 창조자인 것처럼, 신을 프로그래머처럼 묘사한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여러 종류의 법칙과 알고리즘 조합으로 만들어진 가능세계(게임) 중에서 최선의 세계를 구현했다고 주장한다. 최선의 세계를 만들었지만 물리엔진에 해당하는 자연법칙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악과 고통은 어쩔 수 없으니, 신을 욕할 순 없다는 논리다.  그 논리에서 일의 고통이 내재된 삶은 어쩌면 최선의 세계일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다.


출근의 회전목마와 일의 의미


당장 AI가 내게 돈을 줄 일은 없지만 이런 식의 사고실험을 하다 보면, 고통을 벗어나자 권태가 찾아오고, 다시 고통을 찾아가는 서글픈 인간의 습성을 발견하게 된다. 가상 세계에 접속해 알람이 울리자마자 바쁘게 출근을 하고 바이어와 곤혹스러운 협상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삶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라니 믿기지 않다가도 인간을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존재로 본 쇼펜하우어의 말을 떠올려 보면 믿음이 흔들린다.


AI 시대를 여는 기술적 특이점이 엔비디아 젠슨 황의 말처럼 5년 내에 올지, 일론 머스크 예측처럼 2년 내에 올지 모르지만 그 미래와 별개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은 '일은 내게 무엇인가?'이다.


이 책을 쓰기 전까지, 내가 본 일과 일터는 확실히 고통뿐이었다. 하지만 일상의 고통을 걷어내고 의미를 찾아 내려 한 순간, 사람이 보였다. 관계를 알게 됐다. 또 지금의 나라는 인격을 형성한 다양한 경험들이 일과 일터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반면, 고통을 피한 권태로운 상태가 행복의 다른 이름이 되어선 안됨을 깨달았다. 현실의 평온함찾아왔을 때, 게임에 접속해 무거운 가방을 들고 출근하는 바보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되었다. 고통과 권태가 공존하는 일은 성찰의 보리수 그늘이 되어주었다.


일을 아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것, 그것이 일의 의미


그렇다고 일, 직업, 노동 = 사람이란 공식을 두둔하고 싶지는 않다. 일 자체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이 가치중립적이다. 일은 내게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며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일의 의미가 있다면 무엇이 될까?


만약 인간을 위해 죽음의 신을 사슬로 묶은 시지프스와, 굴러 떨어진 돌을 주으러 언덕을 내려오며 성찰에 잠긴 시지프스 누구와 친구가 되고 싶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아마 일을 해본 당신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일의 의미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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