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한 의사 선생님이 있는 동네 내과에 갔을 때 일이었다. 진료를 하다가 최근 생활 패턴에서 뭔가 바뀐 게 있는지 물으시길래 복직했다고 하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회사는 건강에 안 좋아요
회사는 흡연 음주만큼 건강에 안 좋다. 명확한 처방이다. 과로에 인간관계, 쌓여가는 피로와 스트레스 등등. 그럼에도 우리는 먹고살고 사회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회사를 이를 악물고 다녀야 한다.
그러는 사이 점점 일과 일터를 미워하게 되었다. 힘든 일을 하게 되면 힘든 일대로 고통이 찾아오고, 일에 적응하면 권태가 찾아온다. 쇼펜하우어적인 고통 아니면 권태란 사이클로는, 즐겁게 일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방법이 있을까?
일이 문제인가, 일상이 문제인가
한 때 방송사고가 나는 통에 각종 위원회에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라는 식으로 끌려다니던 선배가 있었다. 당장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초를 겪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선배님, 이렇게 고생할 바엔 부서 이동을 하든 휴직을 하든, 편한 쪽이 낫지 않겠어요?" 선배가 대답했다. "살아보니까, 편안해진 순간 평소라면 다른 고통 때문에 무감했던 사소한 일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더라고. 어디 있든 같아. 일상에 고통의 정량이 있는 법이거든."
일상엔 고통의 정량이 있다.
그림은 코파일럿
그렇다. 우리는 고통에 지친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터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한다. 그런데 미워하더라도 그 대상을 지목할 땐 더 정교해야 한다. 만약 괴로운 일을 그만뒀는데도 고통이 여전하다면 어쩌겠는가! 경제적 걱정은 차치하고서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 생각지도 못한 무위고를 겪거나 존재감 상실, 인간관계 단절, 작은 일에도 예민해지는 고통이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사실 고통과 권태를 시계추처럼 오가도록 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일상이다. 대부분의 일상을 보내기 때문에 일을 지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은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좋을 것도 마냥 나쁠 것도 없는 가치중립적인 것이지만 일상에 내재한 고통은 상수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극복
그렇기에 러시아의 미학적 형식주의자들은 예술의 사명이, 일상의 극복에 있다고 생각했다. 창을 열면 꽃밭이 펼쳐진 집에 사는 사람은 꽃의 아름다움에 서서히 무감해지기 마련이다. 이사를 가거나 꽃 대신 연못을 만들어도 일상의 커튼이 내려와 이내 그 사람의 눈을 가릴 것이다. 무엇보다 일상을 매번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술의 목표는 일상으로 무뎌진 감각을 되살릴 수 있는 작업이어야 했다. 다시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것인지 다시 알아보게 하는 것. 그것이 형식주의자들이 주장한 '낯설게 하기' 기법에 숨은 뜻이다.
당신은 일을 미워하는가, 일상을 미워하는가? 일과 일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낯설게 보는 방법을 찾아보자
1. 첫 번째 원칙 : '가고파 섬'을 만들자
고도화된 사회의 부산물로 나온 가짜노동이든, 꼭 필요한 사회적 노동이든, 일은 고되다는 걸 인정하자. 이직을 해도 고통을 일상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인정하자. 그 이후엔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느끼는 데 집중하자. 이때 필요한 것이 '가고파 섬'을 만드는 것이다.
일본 출장을 갈 때 승무원이 공중에 떴다 추락할 정도의 터뷸런스를 경험한 뒤로 비행 공포증이 생겼다. 좁은 비행 좌석에 갇혀 있는 순간은 고통 그 자체가 되었다. 비행 내내 식은땀을 흘리며 견뎌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데 출장이 아닌 여행의 경우엔 고통이 경감되는 걸 발견했다. 조금만 견디면 휴양지에서 수영을 하고 석양을 배경으로 남국의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만했다. 끝이 정해진 고통이 끝나면, 나는 '가고 싶은 섬'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터가 고통스럽고 현재 지위가 불만족스러운 이유는 더 이상 기대할 목적지가 없거나 커리어의 막다른 길이라고 스스로 믿을 때다. 그런 사람은 퇴직까지 견디는 일만 남았으므로 작은 일에도 상처받고 아등바등 살게 된다. 종료 시간이 없는 일은 권태로워지고 피로가 배가되는 법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일을 찾아내, 가고 싶은 목적지인 '가고파 섬'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지금의 일터는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된다. 스트레스 있는 인간관계, 부담스러운 업무도 경유지라면 참을만하다. 언젠가 내가 다른 섬으로 가게 되는 순간, 이런 번잡함은 소소한 에피소드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평생볼 사람도, 평생 따라다닐 실수도 아닌데 뭘 그리 스트레스받을 일이 있을까 싶어 대범하게 넘기게 된다.
'가고파 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바라던 회사에 지원하는 이직의 섬, 올해는 책을 내는 작가의 섬, 공부를 하는 학위의 섬, 소외된 이웃을 돕는 봉사의 섬, 아름다운 새를 보러 다니는 탐조전문가의 섬 등 '가고파 섬'은 마음의 지도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나만의 '가고파 섬'을 만들자. 섬을 꿈꾸며 더 이상 언제 끝날지 모르는 노동에서 벗어나자. 견디는 일상이 아니라 마감이 있는 일상을 만들자. 당신은 '가고파 섬'이 있나요?
2. 두 번째 원칙 : 일터에 대한 은유를 갖자
Life is... 이란 만화가 유행한 적 있다. '삶은... 계란이다.'란 유머도 그런 아포리즘에서 나왔을 테지만, 만약 삶을 계란으로 바라보는 은유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깨질까 조심조심, 노심초사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내면에 자신만의 은유를 갖고 있다.
천상병 시인은 삶을 재밌는 소풍 한번 나온 것이라고 은유했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일을 해변가에 떠밀려 오는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라고 은유했다. 아무리 깨끗이 치워도 내일은 다시 그만큼의 쓰레기가 밀려와 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작가였던 가와바타 야스나리 作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삶을 언젠가 사라질 눈을 닮은 '헛수고'라고 냉소하는 데, 소설 막바지에 이르러 '눈'이란 은유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것이든 아니든, 은유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시나브로 결정짓는다.
내게 일은 '가고파 섬'에 가기 위한 정기선이다. 배에는 자신들만의 목적지에 가려는 선원들로 가득하다. 가끔 풍랑이 치면 배는 크게 기울고 불안과 공포가 찾아온다. 드물지만 맑은 날씨엔 수평선 너머 뛰어오르는 고래 떼를 보는 장관도 느끼게 된다. 배를 다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가끔은 맨손으로 노를 젓기도 하고, 빛이 전혀 들지 않는 캄캄한 기관실에 내려가 일을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참을만하다. '가고파 섬'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의 항로가 어긋나 버리면, 배에서 탈출하거나 뛰어내려야 할 때도 있다. 캄캄한 밤바다 위에 홀로 수영을 하고, 해류에 떠밀려 갈 때면 공포와 불안이 찾아온다. 그러다 운이 좋다면 '가고파 섬'에 닿기도 하고, '가고파 섬'이 생각과 다르다면 또 다른 '섬'을 향해 항해하는 정기선을 갈아탈 수도 있다.
내게 일과 일터는 '섬'들을 오가는 정기선이다. '가고파 섬'에 쉽고 편하게 닿기 위한 배다.
당신의 은유는 무엇일까? 지금 나만의 은유를 만들어 보자.
3. 세 번째 원칙 : 친절하자. 친절하고 또 친절하자.
일은 괴롭고, 일상은 권태롭다. 누구나 비슷하게 살고 있다. 웃음은 나오지 않고 짜증과 우울감이 지배한다. 당연히 서로에게 사무적으로 대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누군가는 친절을 베푼다. 딱히 당장 이득 보는 것도 없는데도 그렇다.
서울 올라와 수술 후 병실에 홀로 있을 때였다. 휴일에 선배가 문병을 왔다. 곁에서 '물이 필요하니?' '간호사님 불러 진통제 좀 줄까?' 물어보며 책을 읽으며 함께 있어줬던 선배의 친절을 잊을 수 없다. 한 번은 심각한 슬픔에 빠져 택시를 탔을 때였다. 표정을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기사님께서 따뜻하게 말을 건네왔다. '괜찮아요. 의자를 뒤로 하고 잠깐이라도 쉬면서 가요.'라고 위로해 주셨다. 마음이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해졌다.
그 이후 여러 번의 친절을 경험하며 깨달았다. 세상은 내가 잘나서 살아지는 게 아니고, 알게 모르게 사람들의 작은 친절과 호의가 모여 살게 하는 것이구나! 누군가 베푼 작은 호의로 살아갈 힘을 얻고 있었구나. 슈퍼맨이 지구를 구해내는 거대한 희생이 아니라, 그저 친절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구나... 느꼈다.
부서에 새로 온 경력직 직원에게 '약속 없으면 같이 먹고 걸을래요?'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건, 내 입장에선 작은 노력도 필요 없는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에겐 몇 배의 가치 있는 친절일 것임이 분명하다. 혼자 부담스러운 프로젝트로 끙끙대는 동료에게, '데이터 정리라도 도울게'라고 퇴근을 두어 시간 미루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료는 힘을 회복한다. 화장실 청소 담당 여사님이 지쳐 보일 때 아이스커피 한잔을 사다 드리는 일도 마찬가지다.
고통이 가득한 일터에서 작은 친절을 발휘하는 사람들은 위대하다. 작은 친절은 내가 가까이할 사람과 멀리할 사람을 가르는 인격의 거름망이 되어 주었다. 일을 잘하거나 못하는 것 따위 하나도 중요치 않다. 내게 일터는 '가고파 섬'으로 가는 배이기에 '섬'에 도착하면 선원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던 친구라면 다르다. 섬 생활이 만족스럽다면, 초대하고 싶은 사람으로 그 친구를 기억하고 떠올릴 것이다.
일상의 극복, 낯설게 바라보기, 아름다운 세상
일은 미워할 대상이 아니다. 극복하고 낯설게 바라볼 대상은 일상이다. 일상이 괴롭다면 '가고파 섬'을 만들자. 일은 꿈을 향해가는 정기선으로 활용하자. 이직을 하거나 퇴직을 하는 건, 항로가 어긋난 배에서 뛰어내려 다른 배로 갈아타는 중이라고 바라보자.
가고파 섬이 예상과 다르다면 또 다른 가고파 섬으로 떠나자. 무엇보다 여정에서 만난 사람에게 친절하자. 작은 친절은 내게는 사소한 행동이지만 상대에겐 부가가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행위다. 세상은 나의 작은 친절로 아름다워진다는 걸 믿자.
이 정도는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은 일을 해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힘을 내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