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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노트 Oct 05. 2024

[에필로그] 일터야 미안해

일터엔 다양한 스트레스가 백과사전처럼 즐비합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중요한 페이지를 찢어간 자들을 닮은 빌런도 가득합니다. CEO, 이사진, 관리자, 직원으로 계급화된 일터는 자꾸 눈치를 보게 만들고 비굴한 굴종을 요구합니다. 몸이 부서지도록 아파도 일 때문에 출근, 홍수로 다리가 끊겨도 출근, 연인과 헤어져 마스카라가 번진 날에도 출근해야 합니다. 일터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일터에서 주는 급여는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스스로 설 수 있게 해 줍니다. 가족을 꾸리고 생계를 이어가며 병원에서 치료도 받게 해 줍니다. 혼자라면 시도할 수 없었던 미션에 도전케 합니다. 방구석에만 있었으면 몰랐을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주선해 줍니다. 손이 일에 익숙해지면서 관련 분야의 경험과 지식도 불어나고 이를 기반으로 사업도 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일터와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출근이란 루틴은 연인과의 이별 따위 금세 잊게 하는 '일상'의 마법을 가능케 합니다. 일터를 긍정할 이유도 따지고 보면 꽤 됩니다.


코파일럿 그림

만사엔 양면이 있다란 속 편한 말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미워할 거라면 좀 더 면밀히 따져 보잔 것입니다.


저는 대학시절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바로 혼자 노는 능력입니다. 노는 거야 다 좋지 싶겠지만 웬만해선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꽤 희귀한 재능입니다. IMF로 휴학을 하고 일 년 내내 집에 있어도 만족스러웠고, 회사에서 휴직을 하고 쉬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루해서 차라리 학교든 회사든 나가는 게 낫겠다.'란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부자라면 지금이라도 빈둥거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빈둥거림이든 노동으로 시간을 보내든, 삶에는 고등어회에 뿌려놓은 레몬즙처럼 은은한 고통이 깃들여 있음은 인정하게 됩니다. 대학시절을 돌이켜보면 마냥 좋게 추억되지만, <시네마 천국> 주인공의 독백처럼 '이 지겨운 여름은 언제 끝날까?'란 은은한 고통의 정서가 배어 있었습니다. 입사를 하고 사회인이 된 뿌듯함도 잠시, 다시 그 고통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옴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루하다고 여름을 탓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고통이 대학교나 일터 탓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일터는 고통의 배경이 되는 계절의 이름일 뿐입니다.  


여름을 극복하려 하지 말고 사계에 깃든 고통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써온 다양한 일과 일터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그런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양한 일을 해온 지 십 년이 지나,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일터도, 꿈꿨던 일도 어느 순간 시시하게 느껴져 버렸습니다. 지루한 여름이 찾아와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루함이란 감정은 가평에서 차 한잔 마시면 달아날 가벼운 감정이 아닙니다.  


허먼 멜빌의 <백경>에서 주인공 이스마엘이 고래잡이 배에 올라탄 이유는 놀랍게도 지루함이었습니다. 소설의 첫 단락에서 지나가는 신사의 모자를 떨어트리고 놀리고 싶을 정도의 지루함이 그를 뱃사람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루함이 이끈 그의 일터엔 흰 고래를 잡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과 그를 따르는 피쿼드호의 선원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흰 고래를 고통의 근원이라 여기고 '모비딕'을 잡아 죽이는 데 올인했던 에이허브는 종국엔 고래에 묶여 심연으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그를 추종했던 선원과 배 역시 침몰해 버립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는, '모비딕'을 잡는 '일과 일터'를 거리를 두고 냉정히 바라봤던 이스마엘입니다.



일로서 고통을 극복하려 했던 에이허브와 고통은 고래 잡는 일이 아니라 삶이라 여긴 이스마엘. 이스마엘은 소설 말미에서 성경 욥기의 말을 통해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고백합니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백경>은 어쩌면 일에 대한 은유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합니다. 고래를 잡아 복수하면 고통이 가실까? 다른 배에 오르면 고통이 가실까? 소설이 가르쳐 주는 것은 어떤 고래를 잡고, 어떤 배에 오르느냐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이스마엘처럼 삶을 극복하려는 냉철함, 돌을 굴리고 내려오는 시지프스처럼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것이 중요하단 것입니다.

세상을 거대한 은유의 바다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슬럼프가 찾아오면 '괜찮을 거야'라며 선창으로 가 지친 몸을 뉘이고 휴식하기, 파도가 높은 곳을 지날 땐 희망봉을 지나고 있다고 되뇌기, 다른 배가 궁금하면 올라타 보기, 물에 빠지면 두려워 말고 천천히 팔을 저어보기, 나만의 가고 싶은 섬을 만들어 꿈꾸기, 무엇보다 함께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친절히 대하기...


일터에 매몰돼 일을 극복하려 하지 않기

삶을 극복한 사람이 되기!


그리고 말해보기


"일터야 미안해. 넌 좋은 배였어. 덕분에 나는 곧 섬에 도착할 거야!"



* 지금까지 읽어주신 친절한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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