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바닥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아빠는 그저 텔레비전을 본다. 대단히 집중해서 보는 것도 아니다. 채널은 쉴 새 없이 바뀐다. 엄마가 '아구구' 소리를 내며 소파에 앉으면 "과일 없어?"라는 말로 엄마의 엉덩이를 순식간에 소파로부터 분리할 뿐이다. 하지만 아빠는 매일 엄마에게 "예쁘다"라고 말하고 엄마 옆에 붙어있고 싶어 한다. 엄마도 그게 싫지는 않은지 "뭐요!" 하면서 아빠 옆에 앉는다. 이 정도면 나름 잉꼬부부 아닐까?
또 다른 일상을 보자. 엄마와 아빠가 장을 보러 간다. 야채 코너, 정육 코너... 우리 가족이 늘 가는 코너에서는 평화롭다. 자, 그런데 엄마가 새로 빵을 발견한다. "네 아빠도 이거 사두면 잘 먹어."라며 빵을 집는다. 그런데 카트를 지키던 아빠의 표정이 좋지 않다. "그런 거 사면 살만 찌지!" 빵 한 봉지였을 뿐인데 엄마가 꽤나 잘못했다는 듯 언성이 높아진다. 엄마는 "자기가 제일 잘 먹을 거면서..."하고 카트 안에 빵을 넣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옆 코너도 들여다본다. 그러자 아빠는 "씁."하고 코평수를 넓힌다. 이내 기세가 꺾인 엄마는 "눈치 보여서 장을 못 보겠다. 다음에는 혼자 와야지..."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래서 나는 결혼에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결혼 생활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저렇게 좋다가도 나쁠 수 있는 게 결혼이라는 걸 현실에서 매일 봐서 그럴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또 다혈질로 엄마에게 상처를 줄 거고, 엄마는 그 상처받은 마음을 붙잡고 내게 털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게 아빠의 흉을 보기 시작한 건 내가 나름 '엄마'를 '한 여성'으로 인식할 대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는 그제야 말이 통하는 상대가 생겼는지, 아빠와의 성향 차이, 성격 차이 등을 들어 흉을 봤다. "아휴, 네 아빠는 정말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엄마가 이야기할 곳이 너밖에 없잖아." 엄마의 레퍼토리였다. 그때는 엄마가 안쓰럽기만 했다. 전편에서 말했듯 아빠의 다혈질과 통제 그리고 가부장적인 성향 등은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기에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보는 흉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흉을 봐도 우리 가족은 어느새 다시 안정을 찾고 웃고 떠들고 있었기에. 물론 그 순간이 오래 지속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또 엄마와 나는 서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이 관계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인정하려고 한다.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