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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폭싹 속았수다. 1

엄마는 퉁퉁 부은 다리와 혓바늘을 열심히 숨겼다.

by 제니
휴가를 위해 떠난 호주행 비행기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시작했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렸다. 광례와 애순, 애순과 금명을 보면서 우리 모녀가 자꾸 연상됐다.
애틋해진 마음에 이번 모녀여행 잘해봐야지, 결심했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엄마한테 모진 말을 쏟아내던 금명이가 됐다. 다섯 편에 나누어 호주 모녀여행기를 연재한다.
“혓바늘이 너무 안 낫네. 오늘 첫 일정은 약국가도 될까?”


모녀여행 4일 차. 호주 멜버른에서 어느 날 아침, 눈을 막 뜬 내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네. 이번엔 왼쪽 혀 전체가 부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엄마는 시리얼은 넘기지도 못하고 요플레만 계속 먹고 있었다. “밥도 안 넘어가고 말도 잘 못하겠어.”


웬일로 안 아프고 불평불만 없나 했는데. 알고 보니 엄마는 여행 출발하는 당일 아침에도 병원에 가 수액을 맞고 왔다 했다. 말로는 여행 잘하려고 예방 차원이었다지만, 오기 전부터 몸살 기운이 있었나 보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엄마는 이번에도 꾹꾹 참고 있었다.


덜컥 무섭고 겁이 났다. 응급실을 가봐야 하나, 혓바늘은 오래 가면 안 된다는데 엄마는 괜찮은 걸까.


엄마는 밤새 잠도 설쳐가며 케미스트리(호주 약국)에서 살 수 있는 혓바늘 약을 여럿 찾아두었다. 안 그래도 여행 오면 더 예민해져서 잠도 잘 못 자고, 다리도 퉁퉁 붓는 엄마인데, 너무 엄마 생각을 안 하고 일정을 짰나 싶어 후회가 밀려왔다. 지난 4일간 평균 1만 5000보씩 걸어가며 이곳저곳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대체 왜 며칠 동안 말을 안 했어! “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입 밖으로 나온 건 날카로운 돌덩이었다. 엄마는 ”네 여행에 방해되고 싶지 않아서 참았지. 어렵게 내고 온 휴가인데 아쉬운 거 없이 보고 가야지.”라고 말했다. 이번에도 ‘나’를 위한 거였다.


“나는 그냥 호텔에 누워있어도 좋고, 카페 가서 멍 때려도 좋아. 엄마가 ‘이번 아니면 또 언제 오나...’라고 자꾸 하니까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그런 거지, 나 좋자고 이렇게 돌아다녔어?”


더 크고 더 날카로운 돌덩이가 또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마는 이내 “그래... 엄마가 잘하려고 한 건데 또 잘못했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난 왜 이렇게 눈치만 보고 살까. 눈치 안 보고 사는 얘네(호주 사람들)가 너무 부럽다.”라는 거다.


집에서는 남편 눈치, 여행 와서는 딸 눈치. 엄마도 어지간히 서러웠나 보다. 나도 뒤늦게나마 엄마가 받았을 상처를 꿰매어보려고 엄마를 달래기 시작했다. 잘못한 게 아니라, 눈치 많이 보는 엄마 성격에 엄마 상태를 말하는 게 익숙지 않은 거라고. 그래도 그런 건 참지 않고 그때그때 말하는 게 우리가 행복하고 안전하게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는 거라고.


오늘은 쉬어가자는 내 말에도 엄마는 한사코 거부했다. “해외 환경이 익숙하지도 않은데 예민하다 보니 호텔에만 있으면 가슴이 너무 답답해. 나가자.” 엄마도 젊고 팔팔하게 돌아다니고 싶은데 쉬이 따라주지 않는 몸이 야속한 듯했다. ”나이 들면 다 그렇다는데, 내가 너무 내 나이를 생각 안 했나 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일 수 있을 것 같아. “


결국 이날은 프로폴리스부터 구내염 연고, 비타민까지 사들고 온 뒤, 호텔에서 푹 쉬다가 오후에 산책을 다녀왔다. 이 여행,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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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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