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무거운 짐을 안고 무작정 나를 따라 공항을 뛰어다녔다.
휴가를 위해 떠난 호주행 비행기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시작했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렸다. 광례와 애순, 애순과 금명을 보면서 우리 모녀가 자꾸 연상됐다.
애틋해진 마음에 이번 모녀여행 잘해봐야지, 결심했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엄마한테 모진 말을 쏟아내던 금명이가 됐다. 다섯 편에 나누어 호주 모녀여행기를 연재한다.
노숙자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난관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귀국은 멜버른에서 시드니를 경유해 인천으로 들어오는 편이었다. 한 번도 경유해 본 적이 없는데 짐을 연계해 주면 별일 없겠지, 하며 콴타스항공에서 수속을 밟았다.
“너 시드니에서 아시아나 직원한테 가봐야겠다. 돈을 덜 냈다는데?” 콴타스항공 직원이 말했다. “여기서 발권이 안되니 내리면 경유해서 창구 먼저 가봐.” 그렇게 인천행 보딩패스는 받지 못한 채 국내선 비행기에 올랐다. 경유 시간이 1시간 30분이라 넉넉할 줄 알았는데, 비행기는 야속하게 30분 넘게 지연됐다.
비행기 안에서 불안이 급속도로 몰려왔다. 엄마는 하루라도 빨리 한국 가고 싶다 했는데, 아직도 혓바늘 안 나았다 했는데, 짐은 이미 인천으로 연계됐는데, 놓치면 맨몸으로 1박 더 해야 하나. 별별 생각을 다 하며 시드니에 도착했다.
“엄마, 우리 큰일 난 것 같아. 내려서 뛸 수 있겠어?” 시드니 공항 경유 상황을 전혀 모르는 나는 비행기를 놓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잔뜩 앞섰다. 엄마는 그저 “응, 응 엄마가 무조건 따라갈게. 넌 앞만 봐!”라고 했다. 콴타스항공 버스를 타고 국제선으로 이동하자마자 어느새 10시. 인천행 비행기 출발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탑승수속 줄은 쉬이 빠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게다가 아시아나 체크인 게이트는 닫혀서 이미 ANA항공으로 바뀐 터였다. 공항 직원들에게 ten thirty flight(10:30 항공편)을 열심히 외치며 앞쪽 줄로 갈 수 있었다. 콴타스 기내에서 준 물을 가방에 넣어놓고 짐 검사를 하는 바람에 거기서 10분이 지연됐지만 말이다.
어찌어찌 통과해 게이트 앞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열심히 뛰었다. 엄마의 퉁퉁 부은 다리와 연약한 무릎은 생각도 않은 채 말이다. 엄마도 질세라 나를 쫓아왔다. 게이트 앞에 도착하니 보딩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아시아나항공 직원들 얼굴을 보고서야 안심이 됐다. 아시아나 직원은 "안 그래도 멜버른에서 오는 비행기가 연착돼서 놓치실 것 같아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라며 티켓을 뽑아줬다. 다행히 우리 티켓에는 문제가 없었고 안전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좌석에 앉고 나서야 엄마가 보였다. 땀범벅이었다. 아차, 싶었다. 그제야 엄마가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를 따라 열심히 뒤에서 뛰었을 생각에 미안함이 몰려왔다. 손이라도 잡고 같이 뛸걸.
생각해 보니 여행지에서도 내가 길을 찾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늘 앞장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엄마는 나를 쫓아오기 급급한 모습이었다. 여유가 있을 땐 엄마에게 돌아가 손을 잡고 오곤 했지만, 엄마의 기억에 혹시 내 뒷모습만 남을까 싶어 갑자기 마음이 아려왔다. "다음에는 엄마 손 잡고 뛸게."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이해한다는 듯, “너는 정신적으로 애쓰고 엄마는 몸으로 애썼다.”라며 내 손을 토닥였다. "엄마도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했어. 힘들었겠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는 "너무나 어렸고, 여전히 여린 그들의 계절에 미안함과 감사, 깊은 존경을 담아 폭싹 속았수다."라며 말로 막을 내린다. 울 엄마, 나 따라다니느라 폭싹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