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는 우리를 계속 따라왔다.
휴가를 위해 떠난 호주행 비행기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시작했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렸다. 광례와 애순, 애순과 금명을 보면서 우리 모녀가 자꾸 연상됐다.
애틋해진 마음에 이번 모녀여행 잘해봐야지, 결심했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엄마한테 모진 말을 쏟아내던 금명이가 됐다. 다섯 편에 나누어 호주 모녀여행기를 연재한다.
호주에서 경찰 불러본 일이 있는가. 대낮에, 그것도 호텔 입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특별히 행색이 남루하거나 냄새가 나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남색 모자를 쓴 한 키 큰 서양 남자가 호텔 입구에 앉아있다가,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타니 슬며시 일어나 따라 탔다. 카드키가 있어야 층수가 눌리는 시스템이라 나는 우리가 머무는 10층을 눌렀다. 그리고 옆을 봤는데 그 남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거다. “몇 층 가니?” 물어보니 그 남자는 씩 웃더니 “네가 가는 곳.(I am going where you are going)"이라는 거다. 순간 소름이 돋아 제대로 쳐다보니, 그 남자 옆에는 시장 갈 때 주로 갖고 다니는 장바구니 캐리어가 있었다. 아 이상하다, 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느리게 닫혀 다행이지, 순간 이상해서 리셉션이 있는 1층을 눌렀다. 서둘러 내렸는데 하필 아무도 없었다.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다는 종이 한 장만 덩그러니 데스크에 놓여있었다. 그 남자는 어슬렁어슬렁 우리를 따라 내렸다. 우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여기 마이크가 내 친구야.” 라며 리셉션으로 들어가는 스태프 문을 열려고 했다. 당연히 staff only구역이다 보니 문은 잠겨있었다.
그 남자는 내게 다가와 무슨 이야기를 더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겁에 질려 계속 내게 “어떡해, 도망가자,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엄마가 어떻게 할까” 등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그 남자와 우리 셋이서 아무도 없는 리셉션에 있느니 빨리 호텔 밖으로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서둘러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가 있는 G층을 눌렀다. 그 남자는 또 어슬렁어슬렁 우리를 따라 나왔다.
한 층 밖에 차이가 안 나 금방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수 있었고,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길 건너 한식당으로 뛰어갔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혹시 한국인 직원이 있는지 물었다.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직원은 기꺼이 국제전화가 되지 않는 나 대신 호텔에 전화를 해주었고, 호텔 직원과 연락이 닿았다.
호텔 직원은 상황을 듣더니 바로 자신이 내려가보겠다고 했다. 한식당 직원은 내게 호텔 직원 보고 데리러 오라 할 테니 그때까지 물 마시며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행히 식사 시간대가 아니라 매장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따뜻한 호의에 한숨 돌린 뒤, 남자가 로비에서 사라진 걸 보고 우리는 방에 일단 가보겠다고 했다.
다행히 그 남자가 서있던 호텔 입구에 많은 투숙객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리셉션 직원을 직접 만나러 올라갔는데, 그 남자가 리셉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우리를 보진 않았다.
얼른 방으로 올라 가 방에 있는 전화기로 리셉션에 전화를 걸었다. 그 직원은 ”방에 안전히 돌아가 다행이다. 그는 내가 데리고 있고 경찰을 불렀다 “며 ”상황 해결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고 했다.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니 그제야 안도가 됐나 보다. 머리가 띵-하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이미 우리 둘 얼굴을 봤는데 보복하면 어쩌지, 걱정도 됐다. 엄마는 ”아직 초저녁도 안 됐는데 엄마 산책해야 밤에 잘 자는데...” 라며 발을 동동 거렸다. “역시 안전한 나라는 없어. 더 조심할걸.” 이라며 공허한 말을 계속 뱉었다.
엄마를 달래고 있으니 호텔 직원이 방으로 올라왔다. 경찰이 그를 내보냈으며, 다시 못 들어오게 밤까지 순찰을 돈다고 했다. 밤 10시면 호텔 로비도 카드키로 입장해야 해서 괜찮을 거라 했다. “우리가 10층에서 머무는 걸 아는데 보복하러 오면 어떡하냐, 너무 걱정된다.”하니 카드키가 없으면 못 올라오니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우리를 안심시켜 줬다. 직원은 또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며 자신의 직통 번호도 알려줬다.
여러 사람의 따뜻한 말과 마음이 오가자 그제야 진정이 됐다. 일은 오후 4시쯤 일어났는데, 어느새 창 밖은 어둑어둑해졌다.
멜버른도 노숙자가 많다고 한다. 마약한 노숙자는 덤. 마약이 불법이지만 경찰이 매번 단속을 돌지는 않아서 클럽 같은 곳들에선 심심치 않게 엑스터시 같은 마약 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가 해준 말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길거리에 마약한 사람과 노숙자가 거의 안 보인다며, 역시 미국과 캐나다와는 달리 (최근 다녀온 로스앤젤레스와 밴쿠버 등에 한정된 경험이다.) 호주는 안전하다고 엄마와 이번 여행을 곱씹고 있던 터였다. “진짜 이번 여행은 평생 기억에 남으라고 이런 일이 생겼나 봐.” 엄마는 자기 전 이렇게 말했다. “아빠랑 오빠한텐 절대 비밀이야.” 우리는 이렇게 약속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