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부사의 모습이다.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경험이 있음에도 다시 시작하고 계속 나아가는 태도를 나타낸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의 줄임말인 '중꺾마'의 모습인 셈이다. 말 그대로 중요한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다. '꺾이지 않았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상처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상처가 있음에도, 아픔이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실패의 기억과 흔적이 또렷함에도 자신만의 목표나 추구하는 방향을 고수하는 모습이야말로 희망을 품은 움직임이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상처나 실패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인정하면서 더 나은 다음을 모색한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라는 낙관주의의 언어는 믿음에 가깝다. 반면에 희망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하다”라는 의지를 내포한다. 이런 의지적 태도는 소크라테스가 말한 탁월함과도 맞닿아 있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와 같은 덕목들은 모두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고, 정의는 불의가 만연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인 것처럼 희망도 마찬가지다. 희망도 이런 성격의 언어이다. 희망은 불안과 절망의 언어가 지배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좌절을 짊어지고 분투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자신만의 결연함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다.
희망은 언어적으로 불안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프리드리히 클루게(Friedrich Kluge)의 어원 사전에서는 '앞으로 몸을 굽힘으로써 더 멀리, 더 정확히 보려는 것'이라고 '희망'을 정의한다. 다시 말해, 희망은 '먼 것, 미래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희망은 '앞으로 도래할 것'을 볼 시야를 열어준다. 독일어 'Verhoffen'은 '희망하다'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사냥에서 '가만히 선 채로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고, 낌새를 읽는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즉, 희망하는 이는 방향을 정하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파악한다는 것이다.
희망은 변증법적 성격을 갖는다. 절망이 짙을수록 희망은 강렬하게 빛난다. 절망과 희망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절망이 지닌 부정성의 방향은 본질적으로 희망을 향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희의와 권태로움은 익숙해져 버린 반복에 대한 새로움을 요구하는 신호라는 점에서 그렇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적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희망은 쏟아져 내리는 격렬한 삶의 물살 위로 떠오르는 무지개와 같다.
수백 번씩 물보라에 삼켜지고, 계속해서 또 다른 새로움을 마주하고,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담대함으로 거칠고 위험하게 울부짖는
물보라 위에 다시 솟아오르는 무지개와 같다.
희망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움직임이자 방향과 지지할 곳을 찾고자 하는 시도다. 낯선 대상,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열린 곳,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희망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눈을 떠야 비로소 볼 수 있다. 의지적으로 일깨우거나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적극적으로 현재의 닫혀 있는 시간을 깨고 나가는 것이다. 미래를 현재의 연장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다른 가능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희망하는 것은 '현실에 신뢰를 갖는 것'이고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른 가능성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현재를 알아야 한다. 현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 바로 '불안'이다.
한 사람을 무너지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불안'이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는 원래 '궁지'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불안은 시야를 좁게 만들고 근시안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불안한 사람은 궁지에 몰린 것과 같다. 당면한 문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안은 새로움과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암울한 미래만을 그리도록 강제한다.
또한, 불안은 부산물을 낳는다. 절망, 회의가 대표적이다. 불안이 지속되면 점차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해결책을 찾으려 해도 시야가 좁아진 탓에 같은 생각만 맴돌 뿐이다. 뿐만 아니라, 불안은 시간 감각을 왜곡시킨다. 당장의 문제가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만들고,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성공 경험은 희미해지고, 미래의 가능성은 보지 못한다. 오직 불안이 낳은 부산물들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돌아봐야 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걸어온 시간들은 평가절하하고, 미래의 가능성과 새로움은 현재를 기준으로 제한한다. 이는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체념으로 이어진다. 지금의 불안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이 불안을 연장시킨다. 스스로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절망의 늪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것이다. 절망은 이렇게 불안의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회의 역시 불안의 동반자이다. 불안한 마음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자신의 능력을, 타인의 선의를, 심지어 과거에 확신했던 가치들까지도 의문시하게 된다. '정말 괜찮을까?', '내가 틀린 것은 아닐까?'와 같은 회의적인 질문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아가지 못한 채, 불안감에 회의와 걱정의 질문들이 계주 달리기를 한다. 불면의 밤을 보내도록 만드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이 시간이 길어지면, 의욕이 사라지고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고, 만남보다는 은둔을, 이성보다는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이렇게 불안은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고, 창의적 사고를 막고, 결국 스스로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사실, 불안은 그림자처럼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럼에도 항상 절망과 회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안의 부산물인 절망과 회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더 빛을 발하고, 회의를 거쳐야만 굳센 믿음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자신만의 신념을 피워내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역설적으로 '잘 해내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에서 발원한다.
'중꺽마'에서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는 희망을 계속해서 품어야 한다. 세상은 희망보다는 불확실성과 좋지 않은 소식들로 가득하다.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더욱 많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불안과 절망이 산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럴 때, 닭으로부터 배워야 할 모습이 있다. 닭은 사람에 의해, 다른 동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알을 빼앗긴다. 그럼에도 계속 알을 낳고 품는다. 좌절할만 데도 신경쓰지 않는 것마냥 또 알을 낳고 다시 품는다. 닭의 생명주기에 의해 호르몬과 본능에 따라 알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쩌면 좌절을 모르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모습에서만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울감에 빠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점에서 만큼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었다면, 아마 좌절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절망과 회의의 늪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차피 안 된다며 단념하고 우울감에 젖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고정적이지 않다. 낮과 밤의 마음이 다르고, 하루 사이에도 엎치락뒤치락 요동치는 게 마음이다. 아침에는 확신으로 가득찼다가도 점심시간에는 확신은 온데간데 찾을 수 없을 때도 있다. 마음은 충만하더라도 상황에 의해 금새 무너져 내리고, 깨져버리기 일쑤이다. 마음을 지키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우리 모두는 안다.
흔히 기억력이 안 좋거나 머리가 나쁜 사람에 빗대어 깎아내리는 표현으로 '닭 대가리'라고 비하하곤 한다. 하지만 때론 의식적으로 닭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음을 체감한다. 모드를 취사선택할 수 없지만, 절망이 짙을 때만큼은 알을 품는 닭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닭이 알을 품는 궁극적인 이유이자 결과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닭은 알이 생명이 되기까지, 온전한 형체를 갖추기까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품는다. 여러 위협과 신경써야 할 요소와 요인들이 많음에도 생명을 품기 위해 감수해낸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희망을 품는다는 것은 많은 변수들과 신경써야할 일들이 생겨도 한결같이 유지하는 고됨을 의미한다.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갖고 감내하는 것을 의미한다.
'알'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있다. 바로 《데미안》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기록으로 남기는 표현이 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 알을 깨지 못하면 죽고 만다. 깨고 나와야 생명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희망 역시 동일하게 품어야 하는 이유이다. 마음을 품는 이유는 실현하기 위함이다. 이는 활력있게 살아가기 위함이자 살아내기 위함이다. 어떤 마음을 품든,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한 마음을 품는 게 희망의 성질이다. 현재에 매몰되지 않기 위한 마음을 품는 게 사람이다. 자신의 상황이라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형체를 갖추기까지 품어야 한다. 그래야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 마음만 갖고 있는 것으로는 알을 깨지 못하고, 그저 썩을 뿐이다.
마음은 닭의 알처럼 빼앗기기 쉽고 깨지기 쉽다. 그럴지라도 또 다시 품을 각오를 해야 한다. 새로움을 잇기 위해 잃은 알들은 잊고 또 낳고 품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알을 깨고 나오기까지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끝내면 안 된다. 닭이 병아리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실현되기까지 계속 품어야 한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처럼, 자신만의 목적과 방향을 위해 계속 마음을 품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