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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훤히 꿰뚫어보는 것"이 통찰이기 때문에 관찰과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을 살펴봤다. 또한 부자와 당나귀 내용을 명제화하는 과정을 통해 관찰한 내용으로 요약했다. 이렇게 관찰된 내용에서 한 단계 더 읽음으로써 교훈이나 깨달음을 발견한 내용을 통찰이라고 말한다. 즉, 관찰과 통찰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자와 당나귀에서는 살펴볼 수 없지만 '배놔라 감놔라' 했던 사람들이 당나귀가 물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자신들이 말한 그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나귀가 죽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를 차치하더라도 부자(父子)가 당나귀를 잃은 본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자신들만의 목적을 잊고 기준이 없었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느라 목적을 잃게 된 것이다. 목적을 위한 당나귀 마저 잃어버린 이유이다.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 이유는 상황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당나귀를 잃고 나서야 읽게 된 것이다. "소 읽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런 점에서 관찰과 통찰은 중요하다. 중요하다고 하니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처럼 따라하는 시늉만 하다가 허무함만 남을 뿐이다. 후회의 교훈이 늦게 찾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뿐이다. 이런 상황을 적게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관찰하는 힘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본질을 파악하면 많은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소모적인 활동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질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우선, 사전에 의하면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 또는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렵다. 본질을 알고 싶어도 정의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사실, 본질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의(精義)에 따라,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부자와 당나귀'에서 부자(父子)가 길을 나선 이유는 당나귀를 팔기 위해서였다. 즉, 부자(父子)에게는 당나귀를 파는 것이 길을 나선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당나귀를 팔지 못했다. 길을 나선 본질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들이 당나귀를 끌고 가는 이유이자 본질을 잊지 않았다면, 여러 사람들의 얘기에 크게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나귀를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이 목적이자 길을 나선 본질이기에, 당나귀를 데리고 가는 방법은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절대적이지 않다. 본질은 자기다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행동의 시작이자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질을 알면 포기할 수 있는 대담함도 생긴다.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면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기에 포기할 수 있다. 계속 붙잡고 있을만큼의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다. 이처럼 본질을 알면 내면에서 벌어지는 소모적인 싸움이 줄어든다. 또한 자신의 방법이 맞다며 따르기를 종용(慫慂)하는 목소리에 크게 좌우하지 않는 근거로 작용한다. 나아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다. 이것이 본질을 파악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것이든 견뎌낼 수 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삶의 이유인, 자신만의 삶을 위한 본질적인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것이든 참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꺼이 인내하며 소망하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방향을 설정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방향이기에 속도는 덜 중요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향이 올바를 때 속도가 붙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때로는 삶의 기준과 근거가, 때로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행동이 본질이 되기도 한다. 움직이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 그것이 본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