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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M Aug 31. 2023

[2] 나의 영화는 어디에

니콜라스 레이, <그들은 밤에 산다>

Moi, lorsque j'ai connu Clyde autrefois

C'était un gars loyal, honnête et droit

Il faut croire que c'est la société

Qui m'a définitivement abîmé

내가 클라이드를 만났을 적에

그는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어

나를 완전히 망쳐 버린 게 사회였음을,

우린 믿어야만 해


- 세르쥬 갱스부르, ‘Bonnie and Clyde’



    ‘할리우드’하면 흔히 그 상업성을 비꼬는 의미로 ‘꿈의 공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한다. 순간을 포착하고 편집 기술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마법을 부리는 영화는 꿈을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가 아니었을까. 최초의 영화감독 중 한 명인 조르주 멜리에스가 요정들의 나라와 달세계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듯이.  한국어 ‘꿈’과 영어 ‘dream’은 모두 소망과 자는 동안 이루어지는 정신 현상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침실은 인간에게 가장 사적이고 은밀한 공간이다. 그런 만큼 본래 우리 각자가 가진 소망, 꿈도 개인적인 것이었을 테다. 결코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똑같은 상품이 아니라. 물론 꿈의 획일화는 그전부터 있었겠지만, 적어도 현대에 개인적인 소망을 획일적으로 누구나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만들고 부합하지 않는 것을 몰아내는 배제가 가장 노골적으로 일어난 곳이 할리우드였음은 틀림없다.


    영화는 왜 양산화, 산업화된 유흥의 도피처가 되었고, 또 사람들은 왜 자발적으로 영화의 관객이 되었을까? 우디 앨런의 <카이로 붉은 장미>에서 보듯,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힘든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영화에서 낙을 찾았다. 그래서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은 거의 대부분  이상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있다. 설령 현실의 문제를 소재로 사용하더라도, 아니면 무수한 양산형 서부극들처럼 가볍게 취급했다. 그나마 노동 계급의 슬픔에 공감한 찰리 채플린조차 (적어도 당시에는)<황금광 시대>의 1925년 원본 결말처럼 끝내 행복과 사랑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공황 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이상적인 인물들만을 비추는 신전과도 같던 극장 말고 또 있었다. 바로 범죄자 커플 보니와 클라이드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대공황 시기 미국의 무장 강도였다. 그들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 범죄자들이었지만, 은행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대공황 당시 억눌려 있던 사람들에게 통쾌함을  가져다주었고, 장례식에도 22,000여 명이 모였을 정도로 서민들의 영웅으로 여겨졌다.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는 분명 보니와 클라이드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보위와 키치는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수배를 당해서 자동차를 타고 도망 다니는 젊은 연인이다. 이들은 여타 고전 할리우드의 주인공들과는 다른 이들로, 원래라면 스크린 바깥으로 추방되거나 서부극의 인디언들처럼 응징되었을 타자들이었다. 감독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오프닝 크레디트도 올라오기 이전에 이 소년과 소녀는 우리 세계에 제대로 초대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자막을 띄운다. 감독이 진정 크레디트을 바친, 존경을 표한 대상은 이 두 국외자들이었다.


    보위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고 남은 일생의 사랑 키치를 만난 곳은 대형 광고판 아래 그늘이 다. 레이는 를 통해 그동안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그늘 속에서 태어나고 죽어간 타자들을 변호한다. 혹자는 그 이전에 타자들을 스크린에 초대한 영화로 토드 브라우닝이나 몇몇 필름 누아르 작품들을 지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B 무비의 그늘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필름 누아르의 인물들은 대부분 애초에 타락해 있는 이들로, 영화는 연민을 표하는 대신 경찰의 편에서 그들을 추적하며 죄의식을 이끌어냈다. 글머리에 인용한 갱스부르의 가사처럼 보위와 키치는 원래 악인이 아니었다. 보위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소년이었고, 그들은 밝은 대 낮에 시내를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존 포드의 <역마차>에 나온 링고 키드와 달라스는 같은 앞날을 꿈꿨겠지만, 그들의 현실은 달랐다. 20달러에 형식적인 결혼식을 해 주며 미국과 할리우드의 상업성을 연상케 하는 주례는 사람들이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보위가 누군지 알자 부탁을 거절했다. 그의 말대로 보위와 키치가 좇던 것은 ‘없는 희망’,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자리였다.

 

    보위는 그의 위치를 넘기면 남편을 풀어주겠다는 경찰의 약속 때문에 옛 동료 매티의 밀고로 사살당한다. 오늘날에는 흔한 클리셰지만, 작품 전체의 태도와 조응하며 이들을 갈라놓고 극단으로 몰아붙인 것이 사회였음을 영화 바깥에 있는 관객에게 고발한 장면이다. 영화는 키치가 보위의 시체에서 편지를 집어 들고 낭독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기에 해피엔딩은 불가능했다. 대신, 카메라는 마지막까지 키치의 발걸음을 천천히 따라가 연인에게 예우를 갖추며, 말을 끊지 않고 그들이 극장의 어둠, 밤에서나마 자기 이야기를 온전히 말할 수 있게 한다.


    장 뤽 고다르는 레이를 두고 ‘영화는 곧 니콜라스 레이다’라며 존경을 표했다. 분명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나  <미치광이 피에로> 같은 작품을 비롯해 뉴웨이브 운동을 중심으로 후대 감독들에게 미친 영향이 크긴 하지만, 이 영화는 꼭 먼저 나와서 좋은 작품은 아니다. <그들은 밤에 산다> 만큼 내몰린 인물들의 곁에 서서 이들의 소망에 어떤 잣대도 들이밀지 않고 순수한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는 드물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들은 밤에 산다>는 영화를 우리 모두의 마법으로 만들었다.


77기 권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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