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친한 친구를 기다리려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AS관 앞 흡연장 공원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우연히 서강영화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다. 어려운 영화를 무턱대고 보여주고, 무작정 감상평을 남기고 토론하라는 방식이 상당히 불편하다며 영화 마니아들은 하나같이 이상하다는 불평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생각했다. 소설, 연극, 전시회 같은 타 문화 예술은 나름대로 보편적 향유층도 많은데, 왜 유독 영화만 어렵다는 인식이 일반적이고 시네필은 특유의 취향을 가진 부정적 의미의 힙스터로서 꺼려지는 걸까..? 시네필에서의 ‘필’이라는 어미는 변태 성욕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멸칭적으로 영화 마니아를 조롱하는 데 사용하는 단어가 영화 마니아를 대표하는 표현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시네필이 조롱을 받을 만큼 나쁜 것일까?
정성일 평론가는 시네필 안내서라는 글을 기획하며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무작정 시작하고 참담하게 몇 번이고 실패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씩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것이다.(생략) 물론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이 목록을 훑어보면서 반발감을 갖고 스스로 당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또한 시네필은 1950년대에 파리를 중심으로 청년층이 매일 영화를 관람하고 토론하며 살아가는 젊은 이들을 칭하는 데서 시작된 명칭이었다. 그렇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좋아하는 영화에 무작정 시작하고 도전하고 실패한 경험도 많았다. 이 경험을 토대로 기성 평론에 반발도 해보고, 타 영화 마니아들과 토론, 논쟁을 하며 자신만의 영화 리스트를 써 내려간 이였다. 시네필이 비하를 받을 만큼 나쁜 이들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시네필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영화를 무슨 특정 지식층만 진정한 의미를 있다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가진 일부 시네필이 부각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는 진정으로 즐기고 그림처럼 즐겨야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데, 처음부터 분석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려는 태도로 인해 그들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반박할지도 모른다. 타 예술도 분석론과 관련 학문이 있는데 그러한 태도가 실패라고? 말이 되는가? 진정하고 침착하게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처음부터’라는 부사가 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고 하였다. 처음 한 번은 극장에서, 그다음 한 번은 극장 밖에서 시작된다고. 우리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놓치는 것이 매우 많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 전시회처럼 마음에 드는 장면은 유심히 지켜보고, 즐길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다들 극장에 차분히 앉아 캬라멜 팝콘과 콜라 라지 사이즈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 그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다시 그를 만나면 달라진 그의 모습에 반하게 된다. 다시 이동진의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제 그는 영화를 불러낸다. 개별 장면을 충분히 떠올리고 특정 대사를 거듭 새기며 순서를 뒤섞어 감평의 또 다른 플롯을 만든다. (중략)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쓰고 또 쓰며, 말하고 또 말한다. 우리는 그를 영화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처럼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다른 영화, 심지어는 다른 예술과 연관을 지을 수 있는 멋진 경험을 영화는 제공한다. 새로운 경험은 다른 예술에서 어떻게 영화가 연관되는지도 멋지게 보여주고, 적용하게 한다. 게임에서는 코지마 히데오, 체인소 맨 같은 수많은 만화 작가의 컷 연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등등... 영화적 연출의 시초, 변용은 수많은 예술 분야에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한다면, 자신만의 표현력이나 감상력, 더 나아가 분석력 또한 기를 수 있다. 영화에 대해 무작정 나쁜 시선을 보내는 것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 공감하고, 그들의 감상회에 동참하여 멋진 당신만의 리스트를 만든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풍요로운 삶을 일굴 수 있지 않을까?
77기 최종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