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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_ 주검 해석

by 제이드 Mar 25. 2025

루쉰의 소설 중 해석하기가 가장 난해하였다. 자신의 목을 베어서 복수를 갚는다는 설정도 이상하고, 머리를 베어도 죽지 않고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검색을 해봐도 설득력 있는 해석이 없었다. 복수는 허무하다는 식의 글이 있었지만, 지금껏 루쉰이 쓴 주제와 맥락상 맞지 않았다. 나는 그 감상이 중국 정통 무협지와 혼동하여 루쉰의 글을 오독하였다고 본다. 뭔가 좀 아쉬운 마음에 글로 남기게 되었다.

 

 

줄거리 ) 메이젠츠는 솥을 긁는 쥐가 신경 쓰여 잡으러 나선다. 우유부단한 성품 탓에 적극적으로 쥐를 죽이지는 못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쉰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 녀석이 쥐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하냐고 꾸짖는다. 아들은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아버지는 검을 만드는 명장이었다. 왕비가 쇳기둥을 끌어안고 잔 뒤 쇳덩이를 낳았는데 임금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검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아버지는 자검과 웅검 두 자루를 만들었다. 검이 완성되면 더 훌륭한 검을 만들지 못하도록 왕이 자신을 죽일 걸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왕은 아버지를 죽였고, 메이젠츠가 웅검으로 왕을 죽이길 바랐다.

메이젠츠는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메이젠츠는 길에서 왕의 행차를 본다. 한 아이가 나타나 메이젠츠를 방해한다. 곤경에 처한 메이젠츠를 검은 사내가 나타나 구해준다.

검은 사내는 메이젠츠의 머리와 검을 내놓으면 복수해주기로 약속한다. 고민 끝에 메이젠츠는 자신의 목을 베도록 하고, 검 또한 사내에게 준다.

왕은 검은 사내가 신기한 재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낸다. 검은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옌즈아오저라고 밝힌다. 그는 왕에게 금솥에 맑은 물을 채운 후 끓여달라고 한다. 그런 다음 메이젠츠 머리를 넣자 물이 솟구치며 머리가 춤추기 시작한다. 왕은 놀라워한다.

솟구치던 물이 점점 약해지더니 솥단지 아래로 내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옌즈아오저는 아이의 머리가 솥 바닥 밑에서 가장 신기한 원무를 추고 있는데 가까이 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왕은 솥 밑을 보게 된다. 그 순간 옌즈아오저가 왕의 머리를 내려친다.

그러자 솥 안에서 아이 머리와 왕 머리가 서로를 노려보며 싸운다. 처음에 메이젠츠 머리가 이기는 듯하더니 왕 머리가 이긴다. 그러자 옌즈아오저도 자신의 목을 벤다. 그리고 2:1 승부에서 승리를 거두고 죽는다.

대신들은 뒤늦게 왕의 주검을 발견한다. 솥 안에서 머리를 꺼내는데 해골이 세 개였다. 어느 해골이 왕의 해골인지 알 수 없었다. 세 개의 해골이 모두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긴 토론 끝에도 결론을 내지 못한다. 결국 세 개의 두개골을 왕의 시신과 함께 금으로 된 관에 넣고 매장한다. 백성들은 역적의 영혼이 왕과 함께 제사를 받을까 눈물을 흘린다.

 

 

해석 )

이야기의 시작은 메이젠츠가 쥐를 잡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메이젠츠는 쥐를 솥 안에 가둔 뒤 물에 담갔다가 뺐다가를 반복하는데 결말부에서 자신의 머리가 솥에서 춤을 추는 것과 대구를 이룬다. 메이젠츠는 쥐을 잡는 과정에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증오심이 들기도 하고, 분노와 동정심을 반복한다. 이는 루쉰이 혁명의 과정 속에서 지배층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혁명하자니 목숨을 구걸하는 지주와 정치꾼들에게 동정심이 들고 혁명하지 말자니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고 괴롭힘은 지속될 게 뻔하다.

어머니는 아들의 유약한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쉰다. 그러더니 아버지 원수를 이야기한다. 아이는 식량을 갉아먹고 잠을 깨우게 하는 쥐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진실을 알고 있는 자다. 혁명의 확신을 갖지 못한 유약한 아이에게 어머니는 진실을 말한다. 어머니의 역할은 아이를 가르치고 길러서 원수를 갚게 하는 일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아이에게 전달한다. 아이가 원수를 갚는 건 숙명적인 일이었고, 그것을 가르치는 건 어머니의 역할이다. 즉, 어머니는 지식인이다.

아버지는 왕에게 억울하게 죽는다. 그가 한 일이라곤 검을 만들어 왕에게 바치는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가 왕에게 바친 건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주권이었다. 민중은 자기들의 주권을 지배층에 갖다 바쳤다. 지배층은 위임받은 주권을 정의롭게 행사하지 않고 민중을 억압하고 빼앗는 데 사용하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검을 들어 처형하였다. (왕은 법 위에 군림하는 자다. 왕의 주권은 칼(군사력)을 통해 드러난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아버지가 죽은 이유)을 알리는 것이 지식인(어머니)의 소명이다.

 

소설에서는 대립물을 통해 억압과 저항의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솥의 물과 불, 검은 머리카락과 흰 머리카락, 자웅, 불과 얼음, 붉은색과 푸른색, 붉은 입술과 푸른 연기, 푸른 베와 검붉은 꽃무늬 등으로 표현한다.

또한 소설의 구성도 반복된다. 솥 안에서 발버둥 치는 쥐와 솥에서 춤추는 머리 / 임금을 죽이는데 실패한 메이젠츠와 임금을 죽이는 데 성공한 메이젠츠 / 왕이 살았을 때 행렬과 왕이 죽었을 때 행렬 / 머리가 동강난 메이젠츠와 머리가 동강난 옌즈아오저 / 옌즈아오저는 메이젠츠의 목을 베고 입맞춤을 두 번 한다. / 이리는 메이젠츠 몸을 두 번에 나눠먹고, 그 이리 또한 두 번에 나눠 먹힌다. 등등 루쉰은 의도적으로 반복과 ‘두 번’에 집착한다. 추측이지만, 헤겔이 말한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역사적 진실을 알게 된 메이젠츠는 자신의 숙명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 결심한다. “그는 이미 자신의 유약한 성격이 고쳐진 듯 느껴졌다. 아무 일 없는 듯 잠을 푹 잔 뒤 원수를 찾아갈 것이다 ~~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차라리 일어날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는 잠들기로 하였지만 여전히 잠들지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갈팡질팡한다. 앎이 실천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루쉰의 한숨)

“메이젠츠는 거대한 변화가 임박했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가 나타나 방해한다. 이 아이는 메이젠츠와 비슷한 또래일 거다. 이 비유는 혁명을 방해하는 건 지배층이 아니라 같은 피지배층 무리라는 뜻으로 보인다. 백인 농장에서 흑인을 괴롭히는 건 흑인 관리자고,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을 가장 괴롭히는 건 같은 조선인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를 괴롭히는 건 같은 노동자다. 이 아이가 다칠까봐 메이젠츠는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당하고만 만다. 주변 민중들은 아이가 어떻게 메이젠츠를 괴롭힐지 구경만 하고 있다.

이것을 구해주는 건 옌즈아오저다. 옌즈아오저는 책의 각주에 보면 루쉰 동생의 아내 노부코를 뜻한다고 한다. 루쉰과 동생이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던 노부코를 원망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옌즈아오저는 이 소설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자신이 가장 미워하는 노부코를 어째서 소설 속에서 복수를 함께 하는 자로 나타낼 수 있었던 걸까?

이는 혁명을 위해서 봉건제와 지배층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같은 피지배층 인물 중에서도 자기가 가장 미워하고 원망스러운 사람과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루쉰(개인)에게 있어 진정한 원수는 동생과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노부코(사적 원한)가 아니라 황제(지배층)였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대의 앞에 둘은 서로를 굳게 믿고 임무를 수행한다.

 

(옌즈아오저는 여러 차례 노래를 부르는데 각주에 나와 있으므로 생략함.)

 

결국 왕의 머리를 솥 안에 넣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싸움은 끝난 게 아니었다. 머리는 곧 정신을 의미한다. 메이젠츠가 육신 없이 머리만 남아도 살 수 있던 건 그의 정신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왕 역시 지배 정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싸우게 된다. 불과 물의 싸움 속에서 메이젠츠는 아이를 상대로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유약한 정신을 버리고 왕의 머리와 치열하게 싸운다. 그러나 왕의 머리가 아이 머리를 이긴다. 이는 곧 지배 이데올로기와 저항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다. 하지만 권력자와 다툼 속에서 개인은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다. 승리를 위해 필요한 건 단순한 응원과 지지가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연대가 필요하다.

그걸 알고 있는 옌즈아오저는 자신의 머리를 잘라 솥에 넣는다. 그리고 연대의 힘으로 승리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수도 있었지만, 루쉰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왕을 발견한 대신들을 풍자한다. 그들은 왕의 머리를 어떻게 꺼낼지 토론하다가 시간만 지체한다. (이때도 그렇고, 이야기 곳곳에 원이라든가 맴돌다, 빙빙 돌다 등의 표현을 많이 쓴다. 루쉰에게 원은 본질(원의 중심)을 꿰뚫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순환되어 버리는 어리석음과 한탄을 상징적으로 쓴 걸로 보인다.)

솥 안에는 세 개의 해골이 나온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 해골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세 개의 해골이 의미하는 건 죽음과 평등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온다. 아무리 살고 싶어도 결국에는 죽는다. 그 후에는 돈 많은 놈은 비싼 관짝에 들어가고, 돈 없는 놈은 값싼 관짝에 들어간다. 하지만 결국 해골이 되는 건 똑같다. 생전에 잘생긴 사람이든 못생긴 사람이든, 권력을 쥔 자든 쥐지 못한 자든 살가죽을 벗겨내면 그놈이 그놈이다. 죽고 난 후에는 왕과 백성, 귀한 신분, 천한 신분이 따로 없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그들은 끝내 누구인지 알지 못해 세 개의 해골을 ‘동등한’ 관에 집어넣기로 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도 진위를 파악하지 못한다. 왕을 위해 제삿밥을 치르면 두 역적이 먹을 것을 걱정한다. 제 살길을 걱정해야 할 백성들은 죽은 왕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대신과 환관, 광대들은 슬픈 체할 뿐이다. 행렬도 뒤죽박죽으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

 

 

루쉰의 글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다. 권력층을 무너뜨리고 주권을 되찾자는 이야기는 혁명적 분위기가 강할수록 알아듣기 쉽게 쓰는 게 좋다. 탐욕스러운 지배층을 한껏 부풀리고 설정도 얼기설기 짠 뒤에 선한 영웅이 나타나 물리치는 방식이다. 한국 영화와 소설이 사용하는 흔한 방식이다.

루쉰은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과정에서도 주인공을 방해하는 아이와 결말에서 왕을 위해 눈물 흘리는 백성을 풍자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왕을 위해 눈물 흘리는 백성들에게 어떤 진실을 알려야 싸울 수 있게 만들까. 궁지에 몰린 쥐 앞에서 날카로운 검을 내지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내놓는다. 루쉰은 소설을 통해 의도적으로 현대인에게 내면적 갈등과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신해혁명 분위기를 딛고 현대인들에게도 생각할 여지를 준 시대를 초월한 통찰력을 제시한 인물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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