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 Jan 08. 2023

부족한 앎을 채우는 직장

재정의된 직장의 모습이란

한때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뿐한 적이 있었다. 입사를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마침내 취업에 성공했다는 성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며 이어진 백수생활을 청산했다는 기쁨에 도취되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직장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내가 대견하여 흐뭇한 미소를 짓곤 했다. 넘어질 듯 위태로운 버스 안에서도 만석으로 가득 차 발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도. 그조차도 내게 기대되는 아침으로 치부되었다. 출근하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이른 아침마다 스터디 카페로 향했던 지난날과 다르게, 직장으로 향하는 아침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내게 목적지가 생긴 듯했다. 그 목적지는 나에게 노동의 대가를 주고 이름을 부여했으며 부모님의 기쁨이 되도록 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하지 못하던 어제는 사라져 버렸다. 이름 없는 취준생이 아닌 누군가가 이름을 불려주는 곳이 생겼다. 헛되다고 생각했던 시간에 노력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다.


들뜬 감정은 일주일도 채 가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잊고 있던 기억이 스멀스멀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긴장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과거의 악몽은 출근길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무 일도 없을 거고 괜찮을 거라는 주문을 자주 읊조렸다. 그렇지 않으면 두려움에 출근길을 나서기가 힘들어질 것만 같았다.


전 직장에서는 회사를 위한 소모품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아니, 그러했다. 직원이라고는 나뿐이었던 팀에서 많은 업무를 던져주던 상사가 있었다.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고 발이 닿도록 뛰어다녔다. 우리가 진행한 사업은 모두 성공적으로 끝마쳤고, 그럴수록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배로 늘었다. 그럼에도 군소리하지 않고 꿋꿋이 해냈다. 그렇게 해야 하는지만 알았다. 모든 실적은 상사에게 되돌아갔고 그녀는 차장에서 팀장으로 승진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직금을 줄 수 없으니 11개월 계약으로 끝마치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면접을 보면 일을 함께 할 수도 있으니 지원하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들어와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희망의 줄을 끊어버렸고 암흑 같은 구덩이에 나를 내던졌다. 사회초년생으로서 겪은 쓰디쓴 직장생활의 결말은 퇴사를 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하니 취업했다는 성공감 뒤로 새까만 그늘이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용당하지 말고 나를 지키며 일하기로 다짐하고 다짐했다.


한가득 품었던 걱정을 바뀌게 된 것은 입사한 지 한 달이 넘어설 무렵이었다. 내게 주어진 업무는 전공과 무관하고 앞서해왔던 경력과도 한 톨의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온통 처음 해보는 일 투성이었다. 입사할 수 있는 조금의 지식이 다였고 업무를 행하기에는 부족한 실력이었다. 일을 하나씩 해나갈 때마다 물음표로 가득 메워졌다. 모든 것에 질문이 따라다녔고 업무 속도는 더뎠다. 기본 업무를 습득하기까지 많은 도움의 손이 필요했다. 스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나자 점점 업무의 농도가 깊어졌다. 물음표는 줄어들었고 그 자리에 느낌표가 메워졌다.


그 뒤로 직장으로 나를 이끈 것은 배움이었다. 맡은 업무에 흥미가 생기면서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업무에 대한 흥미라니. 세 번이나 직장을 바꾸면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 아닌,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해내고 싶은 일들로 의욕이 앞서 궁금증이 마구 일어났다. 이렇게나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은 직장은 처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업무가 적성과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깊게 관여하고 지시대로 하는 일이 아닌,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결과가 좌우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유로이 주관의 개입이 허용되었다. 무엇보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없고 나라는 정체성을 담는 일이었다. 주도적으로 해내야 하는 업무 특성이 압박과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직장에서 싹튼 배움은 개인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 메말랐던 성장 욕구가 스멀스멀 차올랐다. 머물지 않고 더 앞서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이곳에서 배운 업무가 향후 미래에도 도움이 크게 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업무 관련 기술을 개인적으로도 찾아보며 배워갔다. 배움의 폭은 넓어져 마음속에만 품었던 일들도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충만한 앎이 채워졌다. 저 먼치 깊은 곳에서부터 배움이라는 씨앗이 움텄다. 피어난 새싹은 직장에서의 앎과 개인의 앎을 자양분으로 삼고 쑥쑥 커나갔다.


일련의 경험으로 직장이라는 단어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단순히 금전적인 부족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개인의 삶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누군가 희생하고 착취당하고 배움의 기회마저 빼앗기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회사와 구성원이 서로에게 상호 배움이 되는 곳, 부족한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곳, 함께 성장할 기회가 있는 곳. 그러한 곳이 진정한 직장의 모습이지 않을까.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뗄 수 없는 관계라면 잘 가꿔갈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앎이 충족되는 직장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새롭게 느껴졌다. 부족한 앎을 채울 수 있는 직장은 고된 출근길도 기꺼이 감수하게 했다. 직장에 가까워질수록 오늘은 어떤 일을 배우게 되고 어떤 하루가 될지 상상해보곤 했다. 설렘으로 똘똘 뭉친 마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채 출근길을 나서곤 했다.


이전 15화 메말라 가는 개업 축하 화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